2차대전이 끝난 뒤 발트 3국은 군사적 점령을 통해 소련에 확고하게 병합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개방 정책이 펼쳐지자 그 강력했던 지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제 활성화를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던 그 정책은 사회주의 체제의 계획 경제가 실패했으며, 정치적 자유에 가해지던 제약을 철회해야 한다는 명제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올까?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체르노빌 원전 유출 사고로 위기를 느끼던 모스크바에서는 발트 3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그곳에 인간과 환경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광산을 개발하는 등의 계획을 세웠다. 해외로 망명한 동포를 통해서, 인접한 핀란드의 방송을 통해서 서방 세계의 문물에 익숙했던 그들은 소련의 지배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다. 정치인, 종교단체, 환경론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대규모로 시위에 참여하여 독립을 요구했다.
그들의 시위 방식은 특이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치하에서 엄격하게 금지되었던 자국의 민요나 찬송가를 불렀고, 록그룹이 장단을 맞췄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음악제에는 30만이 모여 노래를 불렀다.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4년이 넘도록 이 ‘노래하는 혁명’이 이어졌고, 시위와 독립을 막으려는 소련군의 탱크 앞에서도 그들은 인간 방패가 되어 방송국을 보호하며 흩어지지 않았다. 결국 에스토니아는 유혈 없이 독립을 얻었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라트비아에서는 리가 강가에 수력발전소를 세우려는 소련의 계획이 경관과 환경을 파괴한다고 하여 환경단체가 시위를 주도했지만, 독립의 기폭제는 역시 음악제였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소련의 진압군에 의해 14명의 평화 시위자들이 사망했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탱크 앞에서 결연히 노래를 부르던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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