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13일 인도 펀자브주의 암리차르시에 있는 잘리안왈라 바그 공원에 사람들이 모였다. 펀자브 지역에서 수확에 감사하는 축제가 이날 열리며, 바로 이날은 이 지역의 설날, 즉 한 해가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다. 계엄령이 발효 중인지도 모르며 축제를 즐기려고 시골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원에는 출입구가 다섯 곳 있었다. 계엄령을 빌미로 영국 육군 대령 레지널드 다이어가 해산하라는 경고도 없이, 가장 큰 대문을 폐쇄한 뒤 발사 명령을 내렸다. 총알은 사람들이 몰리던 열린 출입구로 집중되었다. 탄약이 거의 소진될 때까지 10분 동안의 발사로 379명이 사망하고 1200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 영국 정부의 발표였으나, 다른 소식통은 사망자의 수가 1000이 넘는다고 했다. 인도 전체가 영국의 이 만행에 경악하면서 영국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반역의 혐의로 그날 오전에 집무가 중지되었던 다이어가 왜 이렇게 냉혹한 행동에 나섰는지 알 수는 없지만, 처음부터 수사가 미진했다. 게다가 다이어에게 보고를 받은 식민지 당국은 그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옹호했다.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다이어가 인도에서 영국의 지배를 지켜낸 영웅이라고 칭송했다. 언론을 통제하여 영국 국민은 12월에 이르러서야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소식은 인도 전역에 알려져 1920년부터 영국에 대한 비협조 운동이 퍼져나갔다.
인도의 유서 깊은 명문 출신 시성 타고르는 영국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었는데, 한 달 남짓 뒤에야 이 소식을 듣고 작위를 반환했다. 모한다스 간디는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기도와 단식으로 하루를 보내자고 제안했다. 4월16일이었다.
끝까지 희생자들이 폭도였다고 주장했던 다이어는 1927년에 사망했다. 그의 행동을 승인했던 상관 오드와이어는 20여년이 지난 1940년 인도 청년에 의해 암살되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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