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미세먼지 지수를 확인한다. 환기를 하기 전에, 창문을 열어도 될지를 알아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마스크를 착용해야 마땅할 날씨지만, 거리엔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드물다. 마스크 같은 건 엔간해선 착용하지 않는 채로 다만 이 환경에 익숙해져간다. 잿빛 하늘이 봄의 절반 이상을 앗아간 우리 시대의 날씨가 흡사 어린 날에 보았던 에스에프(SF) 영화 속 세상이다. 그 시절 영화들 속에는 로봇이 밥을 차려주고 청소를 해주는 풍경이 펼쳐졌고 창밖은 이렇게 미세먼지로 가득했다. 이것이 종말의 징후인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우리의 주인공은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고독하게 분투했다. 어린 시절의 그 숱한 에스에프물들이 이 지구에 더 이상의 미래가 없다는 듯, 인간다운 삶을 잃어버린 정경으로 채택했던 그 잿빛 하늘이 지금 내 창문 바깥에 있다. 어린 시절엔, 정말로 그런 세상이 온다면 두려움에 떠느라 어떻게 살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런 세상에서는 못 살 것 같은 그때의 마음이 오히려 생경하고 새삼스럽다. 두려움은 잠깐이었고 이내 우리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해야 마땅할 일에 이토록 빠르게 익숙함을 느끼며 적응하는 우리들의 면면이야말로 그 어떤 재난보다 더 두렵고 무섭다. 지금만 같다면, 조만간 인간다움의 최소 조건을 낱낱이 빼앗기게 될지라도, 우리는 또 그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인간다움에 대한 최소한의 주장을 다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면서.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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