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 동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는데, 생각해 보니 두 사안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제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알파고라는 철벽 앞에서 무력하게 보였던 이세돌 9단이 4국에서 첫 승리를 따낸 것은 인공지능보다 사람의 창의성과 적응력이 더 뛰어남을 보여준 쾌거다. 만약 그가 4국에서도 졌다면 정신의 중요한 부분이 잘려나간 듯한 기분이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북한 핵 문제와 한반도 정세가 그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대북 선제공격 훈련을 본격화하고, 북한은 공공연하게 핵전쟁을 언급한다. 전례 없는 대결 국면이다. 실제로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은 작지만 서로 위협하는 수준과 훈련 내용으로만 보면 3차대전이 임박한 듯한 상황이다. 이런 정세가 조성된 것 자체가 대북 정책과 외교의 실패다.
한반도는 남북 대결, 미-중 패권 경쟁, 동북아 나라들의 다차원적 갈등이라는 3중 모순의 한가운데 있다. 이런 모순의 교차점에 있는 게 북한 핵 문제다.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당연히 북한에 있다. 그다음은 미국과 우리나라다. 북한은 미국의 압살이 두려워 핵을 개발한다고 얘기한다. 실제로 다른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북한이 아무리 핵을 갖더라도 강대국이 될 수는 없으며 핵 기술 확산에 나서기도 어렵다. 따라서 미국이 적극 나서지 않는 한 핵 문제는 풀릴 수 없다. 미국이 제기하는 중국 책임론은 책임 회피론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가 중요한 일에서 실패할 때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먼저 성공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 되풀이해서 놓친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3년 동안 핵 문제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그냥 흘려보냈다. 가장 유용한 대화 틀인 6자회담을 재개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대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남북 관계의 개선도 소홀했다. 3년 동안 이뤄진 것은 두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뿐이다.
실패가 확실해진 두 번째 단계에는 책임 떠넘기기가 시도된다. 우선 모든 잘못을 상대에게 전가한다. 상대의 사악한 의도가 강조되고 어쩔 수 없이 일이 벌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아울러 내부에서도 희생양을 찾거나 적을 설정한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로켓을 쏘자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남북 관계를 끊는 등 초강경 대응에 들어갔다. 정부는 적어도 지난해 가을부터 마련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핵실험을 막기보다 사후 대처에 주력한 것이다. 대처의 한 축은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 강화와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를 뼈대로 하는 대북 무력공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12·28 합의도 이 시나리오의 일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축은 북한의 악마화다. 박 대통령은 북한 정권을 구제 불가능한 폭정의 주체로 규정했다.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두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사태는 더 악화하고 새로운 문제가 추가된다. 악순환의 굴레가 형성되는 것이다. 지금은 세 번째 단계의 초입에 있다.
이런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는 끊임없이 권력 강화를 꾀한다. 국가정보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테러방지법을 강행 통과시킨 데 이어 사이버테러방지법을 밀어붙인다. 지금 박 대통령의 모습은 과거 치열한 남북 대결 분위기 속에 유신 체제가 들어서고 영구 집권까지 시도됐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정치를 배운 박 대통령의 정치적 유전자 속에는 그때의 경험이 배어 있을 것이다.
이세돌 9단은 고독한 분투를 통해 인간이 인공지능과 공존할 수 있는 상생의 길을 열고 있다. 반면 정부는 그 반대인 상극의 길로 간다. 우리나라는 핵 문제와 관련한 모든 나라와 깊이 있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특히 미국과 북한을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미국과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앉도록 하는 것이 북핵 해법 찾기의 첫걸음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