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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소연의 볼록렌즈] 제품의 수명

등록 2016-03-02 19:19수정 2016-03-02 21:41

이건 너를 가졌을 때 샀던 거야. 엄마는 고장난 믹서기를 갓난아이처럼 껴안고 어루만지며 속상해하셨다. 때가 꼬질꼬질 끼어서 조금쯤 불결해 보이기도 했고, 마음먹고 깔끔하게 닦아두면 부엌이 다 훤해 보였다. 엄마의 물건들 중에서 내 눈에는 가장 ‘레트로’적인 물건이라 물려받고 싶어서 탐을 낸 적도 있었다. 이제 새 믹서기를 사드려야 하는데, 오래 보아온 애착 때문인지, 그만한 믹서기를 찾지 못해 미루고만 있다. 생각해보니, 내게는 그만치 곁에 두고 함께한 물건이 없다. 엄마처럼 내 물건들이 수십 년을 내 곁에서 함께하기를 애써보았지만, 내가 애를 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작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듣는 건 ‘단종이 되어 부품이 없습니다’라는 말뿐이었다. 얼마 전엔 차량에 장착된 내비게이션 터치 화면이 인식을 못 해서 수리를 맡겼다. 아니나 다를까, 단종이 되어 새 제품을 사야 한단다. 새 제품 중에는 내 차에 맞는 사이즈는 없다고 했다. 내비게이션이 있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추가적으로 차 수리까지 한단다. 물건을 오래 쓰기 위해 고심할 때마다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괜한 과소비까지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품의 수명이 짧아지면서 내가 잃고 있는 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과 인연이 짧아지니, 내 곁에 쌓이는 추억이나 이야기들도 함께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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