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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오철우의 과학의 숲] ‘유령 연구원’과 두 가지 통계

등록 2016-02-04 19:25수정 2016-02-04 21:19

“저는 여러 연구성과도 내고 있는 모 대형병원의 일개 연구원입니다. 말이 좋아 연구원이지 사실상 유령과 다름없지요. 병원에서 일은 하고 있지만 병원 직원이 아니고 공식적으로는 제가 어디에서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지도 모르기에 유령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을 유령 같은 존재로 소개한 비정규직 연구원 한 분이 보내주신 짧은 전자우편은 이렇게 시작했다. 더 깊은 얘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과학기술 선진국 진입 중’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현장 연구원의 열악한 처지. 이런 대비를 최근에 나온 두 가지 통계에서도 볼 수 있었다. 미국과학재단(NSF)은 최근 각국의 연구개발 환경을 조사해 ‘세계 과학·공학 지표 2016’이라는 자료를 냈다(goo.gl/1zxq1U). 국제 비교 지표에서 중국 과학의 약진이 돋보였다. 2013년 현재 조사 대상 학술지 1만7000여종에 실린 논문 219만9704편 중에서 중국이 18.2%(40만1435편)를 차지해 미국 18.8%(41만2542편)에 근접했다. 물론 논문 수와 연구의 질은 아주 다른 문제이지만, 이런 외형 지표는 세계 과학기술 지도가 바뀌는 중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 지표에서 한국의 위상도 돋보였다. 한국은 논문 수로 볼 때 세계 9위(2.7%)를 차지했다. 또다른 중요 지표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 부문에선 세계 1위(4.15%)다. 연구개발 총액으론 세계 5위. 성장세는 몇 해 전부터 나타나 이젠 새로운 소식이 아니지만 이런 지표는 한국의 과학기술이 외형으로 볼 때 연구개발 역량을 굳건히 갖춘 나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다른 통계는 화려한 외형 지표가 다른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게 한다.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가 2015년 의생물학 분야 연구원의 구인·구직 데이터 9000여건을 분석한 자료를 냈다(goo.gl/qAuJXE). 우리 사회의 다른 직종에서도 사정이 비슷하긴 하지만, 연구직 현장에서도 비정규직 비율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구인 자료에선 특히 4대 보험조차 보장되지 않는 일터가 의과대학과 대형병원의 연구직에서 상당히 많은 것으로(50.6%) 집계됐다. 아마도 이런 구인 직종의 연구 현장에, 편지 보낸 분과 마찬가지로 ‘있는 듯 없는 듯’ 일해야 하는 ‘비공식 비정규직’의 유령 연구원은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유령 연구원의 편지 사연을 주변 연구자들한테 전해주었다. 몇몇 분은 이런 얘기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하고 그 비율을 줄이겠다며 시행한 정부 정책 이후에 정규직 비율을 높이고자 그나마 있던 비정규직을 없앤 일이 실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편지 보낸 분의 사연과 걱정도 그랬다. “비정규직으로 연구원을 고용하면 직장 내에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져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을 땐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사람을 한순간에 유령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처우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돌아올 칼날이 무서워 행동하지 못하는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 한 연구원의 하소연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철우 삶과행복팀 기자
오철우 삶과행복팀 기자
화려한 성장 지표에 취해선 안 된다. 연구 현장의 삶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연구개발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서 일선을 맡는 이들도 한국 과학기술 지표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자부심으로 여길 수 있는 날이 오길 간절히 빈다.

오철우 삶과행복팀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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