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학작품을 읽을 때에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읽어온 것들과 거리가 멀어서 느끼는 불편함이다. 좀 더 읽어나가다 보면, 이자는 독자를 위협하고 있구나 싶어진다. 다 읽고 났을 때에는 어떤 경우에는 그 위협을 거뜬히 감당한 자의 포만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 위협에 얼마간 놀란 나머지, 작품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문학 자체에 대한 생각으로 독후감이 번져나갈 때도 있다. 그제야 알게 된다. 이자는 작품으로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기보다 문학 자체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있었다는 것을. 그자의 반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온 독서 체험에 대한 반기이기에, 위협을 받는다는 독자의 느낌은 당연한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한 박자 늦게 알게 된다. 때묵은 관습에 저항하기 위해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반기 자체가 목적이 된 작품들 앞에서 번번이 나는 이렇게 서툴다. 한 박자 늦은 알아챔이지만 위협이 되었다는 기억이 말끔히 지워지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염려도 펼치게 된다. 이자는 자신의 이런 방식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게 된 다음에는 어떻게 작가로 살아갈 것인지, 그래서 작가로서 생명이 짧게 끝나면 어쩌지 하는 염려. 표현은 염려라고 하지만 실은 섣부른 판정을 내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쓸데없는 염려와 오만한 판정을 내리려는 걸까. 위협을 받았다는 복수심 때문일까. 아마도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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