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기업 말고 노동자 민원 해결해야

등록 2015-12-29 18:55수정 2015-12-29 19:00

연말 일정들이 너무 빡빡하게 짜여 부득이 차를 운전하며 지방을 돌았다. 새벽에 집을 나와 광주에서 오전 일정을 마치고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영남 지방의 노동단체가 주관한 강연에 참석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강의 준비를 했다. 밤늦은 시간 강의를 마칠 즈음에는 몸에 피곤이 쌓여 가까운 숙박시설 아무 데라도 찾아 들어가 빨리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강의가 끝난 뒤 사회자가 “혹시 질문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비겁하게도 질문이 없기를 바랐다. 한 여성이 손을 들고 일어섰다.

“저는 오늘 6년 동안 일하던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말을 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금세 눈이 붉어지더니 울음을 삼키며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제조업체에 파견 나가서 6년 동안 일했어요. 그동안 용역회사 사장님은 얼굴도 한번 못 봤어요. 원청회사 사장님을 우리 사장이라고 생각하며 일했어요. 6년 동안이나 일했지만 지금도 최저시급 5580원을 받습니다. 지난달에 잔업을 120시간이나 해서 겨우 200만원 조금 넘게 받았어요. 관리자님한테 ‘왜 저만 해고하냐?’고 물었더니 ‘계약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말만 하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 회사에 취업규칙을 보여 달라고 한 적이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해고한 게 아닌가 싶은데…. 제가 우리 집 가장이거든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중간중간 목이 메어 말을 멈추는 바람에 말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얘기를 듣는 동안 정신이 번쩍 들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가가 자꾸 젖으려고 해서 티 내지 않으려고 공연히 천장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그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취업규칙을 보여 달라고 했다’는 대목에서는 30여년 전 일이 떠올라 혼자서 감정을 추스르느라 애썼다. 취업규칙을 보여 달라는 요구가 해고를 각오해야 할 만큼 어려운 결단이었던 시대가 오래전 우리에게 있었다. 80년대 초반, 노동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노동조합을 설립한 뒤 회사에 취업규칙을 공개해 달라고 요구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취업규칙은 노동자들이 열람할 수 있는 장소에 항상 게시하거나 비치해야 함에도 실제로 그렇게 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노동조합을 설립한 뒤 첫번째 사업이 취업규칙을 공개하라는 요구였을까? 회사가 순순히 공개하지 않자 노동조합은 회사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한 달이나 지난 뒤 근로감독관으로부터 회시가 오기를 “취업규칙은 회사에 게시하거나 비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바, 귀 회사는 취업규칙을 현장 사무실 캐비닛에 비치하고 있으므로 근로기준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사료됨”이라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궁리 끝에 그러한 근로기준법 해석이 과연 적법한 것인지, 만일 적법하지 않다면 근로감독관은 직무유기죄를 범한 것이니 처벌한 뒤 통보해 달라고 노동부 본청에 정중하게 진정을 넣었다. 며칠 뒤, 근로감독관이 노동조합에 친히 전화를 하더니 “취업규칙이 몇 부나 필요하시냐?”고 물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30여년 전에 벌어진 희극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취업규칙을 볼 수 있는 권리조차 30여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노동시장 구조개혁 중 파견법 개정안이 새누리당 안대로 통과되면 지금 32개 업종 187개 업무에 허용되는 노동자 파견이 400개 이상 전문직 업무와 거의 모든 제조업에까지 확장될 것이다. 파견 노동자는 무한대로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용 구조는 기업이 부가가치 창출 노력을 게을리한 채 인건비를 절약하는 방식의 전근대적 경영을 고수하게 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노동자의 소비를 창출하지 못해 나라 경제에도 큰 재앙을 불러오고야 말 것이다. 파견 허용 업무를 이렇게 확대하자는 것은 오래전부터 기업인들의 민원사항이었다. 정부는 기업이 아니라 파견 노동자의 민원을 해결해줘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행복해진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