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눈사람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마종기의 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의 한 대목이다. 고국을 떠난 적은 없지만 고국을 떠나온 것만 같은 심정으로 여행을 다닐 때면 떠오르는 구절이다. 처음 시를 썼던 90년대에는 속임수임이 분명한 희망들이 노골적으로 도처에 전시되어 있었다. 절망은 꼭꼭 숨어 복병처럼 안 보였다. 시가 안 보이는 것을 노래해야 하니까, 그 시절 시인들이 당차게 절망을 노래했다. 이제는 절망이 노골적으로 도처에 전시된 시대를 살고 있다. 가장 안 보이는 것은 희망이다. 그러나 시가 안 보이는 걸 노래해야 해서, 안 보이는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은 적나라한 이 시대의 절망을 노래하는 것만큼이나 멍청한 짓 같다. 그러나 멍청한 시인의 멍청한 시를 나는 은밀히 기다린다. 사람을 둘러싼 풍경 중에서 가장 희망에 가까운 풍경을 가장 멍청하고 가장 오롯하게 제시하는 시를 기다린다. 안 보이는 것은 절망이나 희망 같은 게 아니라, 멍청할 정도로 오롯한 태도 아닌가. 사람의 분별력과 고집이 투영된, 당찬 시의 목소리가 그립다. 숱한 영리함과 숱한 예민함에 파묻혀버린 장면 하나를 시에서 목격하고 싶다. 시인은 가장 안 보이는 걸 쓰는 자임을 다시 기억하며 살고 싶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