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연말 안부를 묻는 자리

등록 2015-12-15 19:07

송년회 철이 돌아왔다. 점점 바빠져서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니 연말 모임이 더욱 소중해진다. 어제 날아온 ‘나눔문화’ 소식지에서 박노해 시인은 삶이 더욱 막막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직감 때문이라며 힘든 일들이 많았던 한 해를 보낸 후 한자리에 모여 우애를 나눌 수 있음을 감사하자고 했다. 나도 오랫동안 서로의 삶을 나누어온 모임의 송년 자리에 갔었다. 다락방이 있는 작은 집에서 채식 식탁을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자유로운 사유와 실천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일찍이 프리랜서의 삶을 선택한 40대 중반 영화감독은 얼마 전 또래끼리 모인 송년 자리에서 “제대로 먹고는 사니?”라는 안부로 마무리하였다면서 씁쓸해했다. 발랄한 20대 동인 친구는 자기 세대야말로 앞으로 뭘 먹고 살지 불안하다며 끼어들었다. 서로를 감염시키는 불안이 심각한 수준이긴 하지만 젊어서 그런지 어찌 되겠지 하는 생각도 있다면서 자기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실은 사람 관계라고 토로했다. 예전 친구들은 너무 바빠서 잘 만나지 못하고, 대학에서는 그나마 팀 프로젝트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서 의기투합해보지만 막상 의견 모으기도 힘들고 약속시간 잡기도 어렵고 결국은 모든 게 틀어지고 말아서 더 이상 일 벌이기도 겁난다고 했다. 대학 학생회 활동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으로 학생회가 지속될지 의문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모든 일을 혼자 하게 되고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데 이래도 되느냐고 묻는 그에게 선배들은 “그래서 결국 너희에게는 ‘제대로 만나기는 하니?’라는 안부를 물어야 하는구나!”라며 한바탕 웃었다.

80년대 대학에서 활약하던 노익장의 강의를 최근에 다시 듣는 기회가 있었다는 또 다른 동인은 그 세대-내 세대-가 여전히 열성적으로 시대를 내다보면서 진지하게 걱정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셔서 참 다행이라 했다. 자기들이 바통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조급증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건재하시니 좀 느긋해도 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잠은 제대로 자는지 궁금해지더라면서 내게 “잠은 제대로 주무시나요?”라고 물었다. 대단한 역사 속에서 찬란한 희망의 시대를 경험했던 세대가 계속 간다고 상황이 나아질까? 이미 강을 건너버린 것 같은데 어찌 밥맛이 나고 잠이 잘 올 수 있으랴. 막막하긴 마찬가지지만 공감의 자리가 무르익어가면서 우리는 슬슬 다시 동인지를 내보면 어떨까 하는 욕심마저 갖게 되었다. “먹고는 사니?” “만나기는 하니?” “잠은 잘 자나?”의 주제로 책을 내면 재미있겠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생각해보면 내가 그나마 잠을 잘 자는 것은 바로 이런 자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먹고살기 어려운 중년과 또래끼리 제대로 만나기도 어려운 청년들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노년이 만나서 소소하게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말이다. 연말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여러 세대가 모여 안부 묻는 자리를 마련하시길 권하고 싶다. 근대화 과정에서 과잉 주체화된 자신을 내려놓고 심심하고 느긋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 서로로부터 배우고 서로를 사랑스럽게 보면서 나쁜 기운을 거두고 좋은 기운만 쏘아주는 자리. 그 자리는 예상된 프로그램이 있고 풀코스 식사가 나오는 그런 자리가 아니라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 장소일 것이다. 유토피아를 애타게 갈망하기보다 이미 현실화된 유토피아이자 기성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 이원 대립 구조에 빠지지 않는 그 ‘어딘가’이다. 어린 시절을 입시 지옥에서 허덕여야 했던 한국 실정에서는 일상의 해방구였던 친구네 방, 밤새워 수다 떨던 단골가게, 계절을 느끼던 동네 골목길과 같은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장소에서부터 밀양 할매나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을 함께 어루만지던 장소들이 아닐까 싶다. 그런 장소를 퇴행이 아닌 생성의 장소로 전환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고 살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가 느껴지는 장소, 그런 장소에서 오랜만에 즐거운 연말 모임 갖기를!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부당 지시 왜 따랐냐”…윤석열 ‘유체이탈’ [2월7일 뉴스뷰리핑] 1.

“부당 지시 왜 따랐냐”…윤석열 ‘유체이탈’ [2월7일 뉴스뷰리핑]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양심의 구성’ [강수돌 칼럼] 2.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양심의 구성’ [강수돌 칼럼]

[사설]“탄핵되면 헌재 부수라”는 인권위원, 그냥 둬야 하나 3.

[사설]“탄핵되면 헌재 부수라”는 인권위원, 그냥 둬야 하나

[사설] ‘모든 책임 지겠다’는 사령관, 내 책임 아니라는 대통령 4.

[사설] ‘모든 책임 지겠다’는 사령관, 내 책임 아니라는 대통령

[사설] 자신 위해 싸우라는 윤석열의 ‘옥중 정치’, 불복 선동하는 것인가 5.

[사설] 자신 위해 싸우라는 윤석열의 ‘옥중 정치’, 불복 선동하는 것인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