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은 건성으로 해야 돼.” 내가 고민을 말하자마자, 함께 차를 마시던 선배가 한 말이었다. 선배는 입꼬리를 약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고 나를 쳐다보았다. 다정하고도 다부진 말투였다. 선배를 따라 나도 입꼬리를 올리고 빙그레 웃었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선배가 “건성으로 해도 돼”라고 말해준 것이 아니었다. 안 그러는 게 더 좋지만 그래도 충분히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선배는 “건성으로 해야 돼”라고 말했다. 나는 “해야 돼”라는 말의 단호한 어감이 좋았다. 그것은 성실함의 반대말인 ‘건성’을 지지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해야 돼. 성실해야 돼. 참아야 돼. 독서를 해야 돼. 모두가 옳다고만 믿어온 것들과 함께해온 “해야 돼”라는 말. 공부를 해도 돼. 성실해도 돼. 참아도 돼. 독서를 해도 돼. 이런 말들은 거의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다. “해야 돼”는 번번이 지당한 단어와 결합되어 일말의 선택권도 허락이 안 되는 숨통 막히는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옳고 좋은 것을 강압적으로 추락시켜버린 나쁜 서술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당한 것들이 지긋지긋함과 연루되게 만든 것이다. 그 강요의 말이 오늘은 차 한잔을 놓고 마주한 오후에, 성실의 반대말과 함께 사용되었다. 오늘은 강요가 아니라, 강요의 반대 방향으로 숨통이 생기는 걸 느꼈다. “해야 돼”라는 말이 강압이 아니라 해방감이 되었던, 최초의 경험이었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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