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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이 시대 ‘송곳’들이 광장에 모인다

등록 2015-12-01 19:21

최규석 작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 <송곳>이 막을 내렸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을 듣지” 등 보석처럼 빛나는 명대사들을 남기기도 했다.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송곳>의 주인공 구고신의 ‘실제 모델’이 아니다. 여러 사연들 속에 내 얘기도 좀 섞여 있을 뿐이다.

구고신이 중국집 배달부의 체불임금을 통쾌하게 받아내는 일화의 주인공은 지금도 택배 노동자들을 조직하느라고 전국을 동분서주하고 있는 심아무개 활동가이고, 이수인이 노동운동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실제로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은 김아무개 노무사를 비롯한 부천 지역 활동가들이고, 고문 후유증으로 신부전증을 앓느라고 하루에 네 번씩 복막투석을 하면서도 일반노조를 조직해 낸 사람은 부산 지역의 송아무개 활동가이고, 부진노동상담소의 실내 모습은 나 같은 사람들은 일찍이 문 닫아버린 노동상담소를 아직도 구로 지역에서 끈질기게 운영하고 있는 문아무개 소장의 사무실과 거의 같은 구조이다.

최규석 작가가 고맙게도 “하종강에게 구고신 캐릭터의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지만 그 말은 “영감만 받았을 뿐”이라는 뜻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구고신이 노동자들에게 하는 교육 내용, 데모하고 잡혀간 대학생에게 대공 수사관이 다짜고짜 “북한 언제 갔다 왔어?”라고 묻는 장면, 고문 사이사이에 수사관이 “청평에서 수상스키를 탄다”고 자랑하는 모습 정도가 내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내 담당 형사였던 사람이 30여년 세월이 지난 뒤, 한 시민단체가 입주해 있는 건물에서 주차관리원으로 일했고 그 건물의 주인이 절친한 내 후배였다.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 버리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라는 대사 때문에 사람들은 ‘송곳’에 비유되는 활동가들이 뭔가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최규석 작가도 지적했듯 그들은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구부러질 때 혼자 바로 서 있으니 송곳처럼 우뚝 선 존재가 됐을 뿐이다.

<송곳>의 시대 배경은 2003년인데도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송곳’들을 너무나 많이 볼 수 있다. 얼핏 생각나는 것만 꼽아봐도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 고려수요양병원, 기아차 비정규직,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동양시멘트, 콜트콜텍, 세종호텔, 케이티엑스 승무원, 삼표-동양시멘트, 부산합동양조 ‘생탁’과 한남교통 택시 노동자 등 이제 ‘몇년 장기투쟁’이나 ‘백몇십일 고공농성’ 등은 언론에 간단히 보도되지도 않을 만큼 흔한 일이 돼 버렸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스스로 행하는 고행도 그토록 고통스럽지는 않다.

인권의식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송곳’들을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행위조차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2011년 5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4대강 사업 중단 등을 촉구하며 항의 집회를 벌이던 독일 동포들을 일단의 사람들이 가로막자 이를 목격한 독일 경찰들이 황급히 달려가 당장 시위대 앞에서 비켜줄 것을 요구해 머쓱하게 물러나는 일이 벌어졌다. 거의 같은 일이 2014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도 발생했다. 총리 공관 앞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는 동포 10여명을 한국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제지하자 캐나다 경찰이 시위대와 경호원 사이에 들어가 “당신은 이 사람들을 건드릴 수 없다.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며 시위대를 보호하는 장면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독일과 캐나다 경찰은 한국을 어떤 나라라고 생각했을까?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그 ‘송곳’들이 오는 5일 광장에 다시 모인다. 무자비한 탄압이 예상되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못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못 받는 인간들, 세상에 걸림돌 같은 인간들”이 세상을 바꾼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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