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숨진 지 곧 4돌이 된다. 이후 많은 일이 있었다. 후계자인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전격 처형한 일이 보여주듯이 정권의 억압적인 성격은 여전하다. 하지만 하나의 체제로서 북한 정권은 안정됐다고 보는 게 일반적 평가다. 1980년 이후 중단된 노동당 당대회를 내년 봄에 열기로 한 것은 이행기를 끝내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더 뚜렷한 것은 ‘개혁·개방 드라이브’다. 최근 ‘나선경제무역지대 종합개발 계획’은 그 지향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계획은 중국·러시아와 인접한 함경북도 나진·선봉 지역에 산업구 9곳과 관광지 10곳을 개발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북한의 경제특구는 김정은 집권 이후 급증해 이미 20여곳에 이르지만 나선특구는 특별하다. 우선 외국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과 이윤 보장을 허용한다. 이곳에 진출할 북한 기업의 이름을 미리 공개한 것도 이례적이다. 게다가 이 지역은 중국의 동북지역 개발계획과 맞물려 앞날이 유망하다. 러시아 역시 극동지역 개발의 한 축으로 이곳을 주목한다. 현재 북-중 교역의 70%는 북한 서북쪽 끝의 신의주-단둥 지역에서 이뤄진다. 앞으로 북동쪽 끝의 나선 지역이 상당 부분을 떠맡게 될 것이다.
북한에는 이미 400곳 이상의 장마당(민간 시장)이 있다. 2000년의 2배가 넘는 수치다. 사경제는 이미 북한 경제의 중심이 됐다. 김정은은 10월10일 노동당 창건 70돌 연설에서 ‘인민’을 90차례 이상 언급했다. ‘인민경제’ ‘인민생활’은 지금 북한 정권의 최대 관심사다. 그 인민의 주축이 장마당과 함께 성장한 젊은층이다. 이들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김정은은 개혁·개방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노선은 장성택이 추구하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을 처형했지만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는 정도전의 구상을 실현한 것과 닮았다. 김정은의 시간은 열려 있다.
우리나라와 한반도 관련국은 모두 북한의 개혁·개방을 요구해왔다. 북한은 이미 개혁·개방 초기 상황을 넘어섰다고 진창이 중국 연변대학 국제정치연구소 소장은 말한다. 이런 상황에 걸맞은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협력이고, 다른 하나는 핵 문제 해결 노력이다.
북한 개혁·개방의 성패는 관련국의 호응에 달려 있다. 2000년대 초 북한은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인인 양빈을 책임자로 하는 신의주특구 설치와 시장경제를 대폭 수용한 7·1경제관리개선조치 등을 잇달아 내놨다. 하지만 중국이 양빈을 구속하면서 신의주특구는 시작도 하지 못했고, 7·1조치는 심각한 부작용과 보수파의 반발로 용두사미가 됐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중국의 동북지역 개발계획은 고속도로와 고속철 등 탄탄한 물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정부의 정책적 뒷받침을 받고 있다. 최근 북-중 접경지역을 답사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도처가 건설 공사 중”이라며 “2012년엔 보지 못한 풍경”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중 경협에는 장기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이 결여돼 있다. 북한 개혁·개방의 내용을 제대로 채워줄 나라는 우리뿐이다. ‘북한의 중국화’는 우리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핵 문제 해결 노력에 새 동력을 불어넣는 것도 우리만이 할 수 있다. 북한이 대화를 거부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대화 전망이 부정적인 탓이 크다. 대화를 하면 해법이 나올 수 있다는 확신을 북한에 주려면 한·미·중이 먼저 의지를 갖고 신호를 보내야 한다. 김정은 정권이 핵·경제 병진노선을 고수하는 것은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다. 다른 방식으로 체제 안정성이 담보된다면 핵에 대한 태도는 바뀔 수 있다. 그 해법 또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오늘 남북 당국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린다. 양쪽 정권의 출범 이후 긴 호흡을 갖고 시작하는 본격적인 만남으론 처음이다. 작은 이견에 집착하지 말고 큰 틀을 짜나가야 한다. 북한의 개혁·개방과 경협 확대는 남북 모두에게 좋다.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디딤돌이기도 하다. 진짜 대북정책은 이제부터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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