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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석구 칼럼] 새벽은 왔는가

등록 2015-11-23 18:50

한 인간의 일생을 한마디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삶 자체가 워낙 다층적이라 어느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180도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든 한평생을 관통하는 삶의 원칙과 고갱이는 있기 마련이다.

엊그제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민주화’이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이유가 있다. 이는 그가 민주주의자로 살았다기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진전되는 과정(민주화)에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미성숙된 민주주의가 그나마도 질식될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그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했다.

영원할 것 같은 유신독재 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이도 그였다. 그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며 극으로 치닫던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 보복으로 1979년 10월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자 부산·마산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둘러싼 유신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유신정권은 한 달도 채 못 돼 종말을 맞았다.

유신독재 종말 뒤 잠시 반짝했던 한국 민주주의는 5·18 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군사독재에 의해 다시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5월18일 민주 회복 등 ‘민주화 5개 항’을 내걸고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을 강행했다. 그의 단식으로 숨죽이고 있던 민주화의 불길이 다시 살아났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전두환 군사정권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3당 합당으로 한국 정치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지만 그는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문민시대를 열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군대 사조직인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실시 등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화라는 말은 현실정치에서 그 의미를 잃었다. 힘들었던 민주화 과정이 마무리되고 민주주의 시대가 열린 듯했다. 그의 명언으로 회자되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그 ‘새벽’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과연 그런 새벽이 왔는가.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가 밝은 햇살을 받으며 활짝 꽃을 피우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민망할 만큼 지금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암담하다. 잠시 새벽인가 했더니 다시 캄캄한 어둠 속으로 뒷걸음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는 새로운 방식으로 질식당하기 시작했다. 폭압적인 군사독재 대신 합법의 탈을 쓴 검찰과 경찰 등을 동원한 문민탄압이 강화되고, 나라와 국토는 소수 집권세력의 이익 추구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명박 집권 2년도 못 돼 검찰의 ‘표적 수사’에 시달리던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퇴행에 분노하며 “집회에 나가든, 인터넷에 글이라도 쓰든, 그도 저도 아니면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고 호소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미명 아래 민주주의의 퇴행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공안세력들이 청와대를 비롯한 주요 권력기관을 장악하고, 자신의 국정 방향에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종북 딱지를 붙이며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한다. 최근에는 거센 반대에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박 대통령이 상정하는 정상적인 사회는 그의 아버지가 집권했던 유신독재체제인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민주적이고 비정상적인 행태를 이해할 수가 없다.

정석구 편집인
정석구 편집인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마무리했다고 생각한 민주화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박정희의 딸에 의해 짓밟히는 걸 지켜봤을 것이다. 더욱이 민주주의 퇴행에 앞장서고 있는 이는 그의 ‘정치적 아들’임을 자임하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다. 그가 목숨 걸고 열었던 민주주의의 새벽이 ‘구국의 결단’이라던 3당 합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의해 다시 짙은 어둠 속에 잠기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민주화의 큰 산이었던 그를 떠나보내는 심정이 착잡할 수밖에 없다.

정석구 편집인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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