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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소연의 볼록렌즈] 모르는 동네

등록 2015-11-18 18:50

점심을 먹고서, 해가 질 때까지 걸었다. 걷다가 모르는 동네로 접어들었다. 모르는 동네는 모르기 때문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처음 보는 가게들이 있었고, 억새와 갈대가 듬성듬성 무리지어 있었다. 모르는 커피집에 들어가 차를 한잔 마셔보았다. 물가에 앉아 보라색 쑥부쟁이를 한 송이 꺾었다. 되는대로 걷다 보니 여기가 어딜까 하고 잠시 두리번거렸다. 노을이 붉게 지는 쪽을 등지고 더 멀리까지 걸었다.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밥을 차려 먹고 개수대에 그릇 몇 개를 놓아두고 세수를 한 것 말고는 빈둥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걷기만 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기분이 좋았다. 아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모르는 동네에 오게 되어 더 기분이 좋았다. 모르는 동네에서 허름한 빵집에 들어가 “이 집에서 어떤 빵이 잘 팔리나요?” 하고 묻고서, 갓 구워져 나온 슈크림빵 하나를 사들고 한 입 한 입 베어물며 집을 향해 걸었다.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모르는 동네의 골목을 구석구석 누빌 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잠깐 잊고 있었다. 얼마나 바빴는지, 당장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안중에 없었다. 매일, 하릴없이 산책이나 하면서 들꽃이나 꺾으면서 빵이나 사먹으면서, 길거리에서 서성이면서 살아왔던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 유리병에 수돗물을 담아 쑥부쟁이를 꽂았다. 비좁은 마음속에 자그마한 자리가 생겨 있었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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