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퍼’(CRISPR)라는 낯선 말이 대중매체에 등장한 건 최근이다. ‘유전자 가위’라는 좀더 익숙한 별명으로도 불린다.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의 디엔에이(DNA)를 찾아 자르는 미생물의 면역반응은 이제 유전자를 다루는 지구촌 생명과학 실험실에서 뜨거운 관심사가 되었다. 2013년 초부터 확산해 불과 몇 년 만에 실험실의 “혁명”, “격변”을 일으킨 기술로 불리니 말이다. 유전자를 다루는 기법은 1970년대 이래 발전해왔으나, 이제껏 없던 방식을 도입한 유전자 가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싸고, 빠르고, 정확한 유전자 조작 기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반인한테는 낯설지만 유전자 가위가 바꿀 세상에 대한 상상은 생명과학계에서 낯설지 않다. 디엔에이 교정 기법이 정확성을 높이면서 유전자 치료는 훨씬 손쉬워질 것이다. 말라리아 매개 모기 같은 나쁜 생물종을 몰아낼 수 있는 구상도 제시된다. 생식세포나 배아 단계의 유전자를 바꿔 좋은 형질을 대대손손 물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자 가위 기법의 잠재력이 강조될수록 과학의 힘에 대해 낙관과 비관이 엇갈린다.
너무 혁신적인 기법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다 보니 과학계 내부에서도 속도조절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 배아에 이 기법을 사용하려는 섣부른 연구를 중단하고 전문가와 시민의 토론이 우선해야 하다고 주장해 주목받았다. 최근엔 권위 있는 국제 생명윤리 전문가 모임인 ‘힝스턴 그룹’(hinxtongroup.org)이, 오히려 우려 때문에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기초연구를 멈추게 해선 안 된다는 합의문을 내어 주목을 받았다.
여러 매체가 힝스턴 그룹의 합의문이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가위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으로 전했는데, 찬찬히 읽어보면 거기에선 낯선 기술을 다루는 사회적 과정에 대한 프로그램을 읽을 수 있다. 과학 연구와 사회적 가치가 충돌할 때 합의는 어디에서 나올까? 낯선 기술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후대와 생태계에 끼칠 영향을 가늠하기 힘들 때, 낯선 기술은 기대와 걱정을 자아낸다. 위험과 혜택은 낯선 기술 속에 공존한다.
합의문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답을 구하려는 급한 마음에선 복잡하고 난해한 과학 논쟁이 어지럽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합리적인 논쟁 절차를 지키는 사회 역량을 신뢰할 수 있다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가로와 세로의 많은 생각과 주장이 새겨진 결론이라면 좀더 넓은 동의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보니 합의문의 여러 대목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민주적인 합의 절차에 관해 고민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장·단기 문제와 다른 성격의 문제 뒤섞지 않기, 쟁점을 골고루 다루기, 위험과 혜택을 두루 따져보기, 전문가와 대중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등은 논쟁에 필요한 ‘게임의 규칙’처럼 여겨졌다.
‘충분한 토론과 논쟁’에 대한 강조도 눈에 띄었다. 때때로 논쟁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실천에 걸림돌이 되는 사회적 낭비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신중해야 할 사안이라면, 선택할 길이 흐릿할 때 논쟁은 지혜를 줄 수 있다. 과학 연구와 사회적 가치의 균형을 담금질하기 위해, 다 알지 못하는 위험과 혜택 사이에서 현재에 알맞은 판단을 구하기 위해,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낯선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논쟁을 거치며 어떤 모습으로 익숙해질까? 국내에서도 올해의 ‘기술영향평가’ 대상 기술로 인공지능과 유전자 가위 기술이 선정돼, 정부와 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토론과 논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전문가와 시민의 실질적 참여를 넓히는 논쟁이 벌어지길 기대한다.
오철우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cheolwoo@hani.co.kr
오철우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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