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헤어진 여자친구의 부모를 치밀한 계획 아래 잔혹하게 살해하고는 현장에서 그녀를 성폭행까지 한 흉악범에 대해 극형의 선고는 당연합니다.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이 2년7개월 만의 일이라니 우리 법원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쟁점은 우리의 극형, 최고형이 반드시 ‘사형’이란 형벌이어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살인자에게는 사형, 이는 누구나 있는 원초적 감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명 단계에서 어느 나라도 그렇게 처형을 하지 않습니다. 사형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실행될 최후의 수단으로 물러섰습니다. 우리는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점차 처형의 빈도를 줄여오다가, 1998년부터는 사형 집행을 멈추었습니다. 18년에 걸친 우리의 체험은 사형에 집착하지 않고도 정상적인 형집행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사형 폐지는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법률로 사형을 폐지한 나라가 100개국이고, 1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는 나라가 40개국입니다. 유엔 기구들도 사형 폐지 결의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모든 유럽국가들이 사형을 폐지했습니다. 사형을 두고 있는 미국에서도 20개주는 사형을 폐지했고, 사형 폐지 주는 늘어가고 있습니다. 사형을 기본형벌로서 집착하는 나라는 중국, 북한, 베트남 등 사회주의권입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대개 사형을 두고 있는데, 그중 몇몇은 잔혹한 집행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사형을 폐지한다고 흉악범을 풀어주는 게 아닙니다. 흉악범은 종신형이나 무기형으로 복역하게 될 것입니다. 교도소는 흉악범의 재범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로서 충분한 기능을 발휘합니다.
사형을 폐지하면 장래의 흉악범죄를 막을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흉악범들은 적발될까, 체포될까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먼 훗날에 올지 모를 사형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범죄를 억제하겠다는 장기적 비전을 갖지 못합니다. 눈앞의 범죄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 이외에는 딴생각을 하지 못하는 심리적 터널 속에 갇혀 있습니다. 체포될 때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수처럼 거친 자도 수형생활을 통해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법감정에 비추어 사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족의 상실감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며, 범죄자에 대한 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흉악범행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아픔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함께 나누고, 피해회복을 위한 정신적·물질적 지원에도 앞장서야 합니다.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그 아픔을 함께하고, 함께 치유에 나서는 이웃공동체입니다. 정의로운 처벌은 치유의 한 과정으로서도 필수적이지만, 그 정의가 반드시 사형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 사형을 폐지하면 테러범죄에 대처할 수단을 포기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테러범에게 사형이란 순교자 심리를 유발할 뿐으로, 사형이 후속 테러의 억제요인이 될 리가 없습니다.
대법원이 지적했듯이 사형의 존폐 여부는 “입법자의 결단”입니다. 우리 국회는 사형을 폐지하는 대신 종신형을 도입하자는 법안을 지난 십여년 동안 일곱차례나 제출했으며, 올해에는 여야 의원 172명이 폐지법안을 제출해놓은 상태입니다. 이 문제는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접근하지 말고, 냉철한 숙고와 정밀한 토의를 거쳐 정치적 결단으로 풀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실질적 폐지국’의 단계에 있는 한국은 이제 사형제도 자체의 폐지에 이를 만한 시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한국의 사형 폐지는 주변 국가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공개처형이란 잔혹한 방법을 일상화하고 비법률적 처형까지 서슴지 않는 북한 체제를 인권적으로 압박·견인하는 촉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여러 인권쟁점이 얽혀 있는 동아시아에서 인권국가로서의 한국의 위상을 일신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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