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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세실을 위하여

등록 2015-08-25 18:45수정 2015-08-26 10:04

여름에 어릴 적 친구네 집에 잠시 들렀었다. 그 친구는 호수가 1만1842개나 되는 미국 미네소타주에 살고 있는데, 호숫가에 별장을 가진 부유한 친구들을 많이 둔 덕분에 호수에서 보트도 타고 수영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그러나 그 멋진 별장에 갈 때마다 나는 거실 벽에 튀어나온 사슴 트로피 때문에 놀라곤 했다. 도대체 이것은 어디서 온 취향일까? 일본사람 집에 가면 전실 벽면 한 곳을 비워두고 꽃꽂이나 붓글씨 족자를 걸어두거나 한국사람 집에 가면 가족 단체사진이 걸려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 백인들의 동물 트로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서구 식민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일까, 아니면 서부개척시대에 생긴 전통일까? 이런 의문을 던지고 있던 차에 친구가 이 동네 사는 치과의사가 아프리카에서 사자를 죽여서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 집 앞으로 “살생자” “우리가 세실이다” 등의 푯말을 든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장미꽃과 동물 인형들을 쌓아두고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치과의사 파머 씨가 죽인 사자는 보통 사자가 아닌 세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열세살 된 수사자이며 짐바브웨의 황게 국립공원에서 위풍당당함을 자랑하는 우두머리 사자였다. 그는 이 사냥을 위해 5만달러(5800만원)를 지불했으며 트럭에 동물의 고기를 매달아 세실을 국립공원 밖으로 유인했다는 것, 활 사냥꾼인 그가 공원 밖으로 나온 세실을 쏘았고 세실은 40시간이나 고통 속에 배회하다가 총에 맞아 숨졌는데 머리는 잘리고 가죽이 벗겨진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세실은 또한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사자들의 생태계 연구를 위해 위치추적기를 부착한 사자였다고 한다. 파머 씨는 “사냥이 끝난 뒤에야 이 사자가 유명한 사자임을 알게 됐다”고 유감을 표시했지만, 그의 야만적 행위에 대한 항의가 빗발쳐서 뉴스가 나간 지 사흘 만에 10만 시민이 서명한 탄원서가 백악관으로 보내졌고 백악관은 이를 철저하게 조사해서 방안을 내겠다는 답을 내보냈다. ‘트로피 헌팅’에 대한 비판여론에 그간 미적거리던 미국 대형 항공사들도 사냥꾼들의 전리품은 운송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고 유엔 생태담당국에서도 이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고 했다. 짐바브웨 환경부 장관은 파머 씨가 국내에서 심판을 받도록 하겠다고 발표했고, 그를 도운 가이드와 농장주는 세실의 죽음을 방조한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다. 파머 씨는 세실을 사냥한 후 코끼리 사냥을 하고 싶어했는데 큰 코끼리를 찾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천박한 취향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일었다.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그런데 그런 뉴스가 나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8일 파머 씨 치과는 문을 열었다. 짐바브웨와 미국 간에 범법자 관련 상호 협약이 이루어져 있음에도 짐바브웨 정부는 파머 씨를 소환하지 않기로 한 것 같다. 현지 가이드와 농장주는 200달러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고-짐바브웨 1인당 국민총생산은 860달러다- 공판은 연기되었다고 했다. 부시맨의 자손이라는 가이드는 조상이 물려준 그 땅에서 외국인들의 사냥을 돕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사냥 산업이 짐바브웨의 주요 산업이라는 것, 고액의 사냥 면허 비용과 고액에 거래되는 트로피 산업 덕분에 그나마 아프리카의 동물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등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온라인 댓글에서는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못 본 척하면서 왜 사자 한 마리의 죽음을 가지고 난리냐거나 사냥은 합법적 스포츠라며 “위선 떨지 마라, 넌 점심에 뭐 먹었냐?”는 식의 빈정거리는 글들이 올라왔다. 세실의 죽음으로 잠시 ‘거룩한 마음’으로 생명의 연결성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남근적 트로피의 시대를 바꾸어내기가 그리 쉽지 않을 듯하다. 세실의 사진을 거실 벽에 걸어두고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가학적 인간을 용서해달라고 빌어보려 한다. 사냥감을 집의 한가운데 걸어두는 죽음 충동의 시대를 끝내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번 여름 살생하지 않고 잡아서 날려 보낼 수 있는 그물망 파리채를 보내준 경주의 조안빈 모녀께 축복을!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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