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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직업병 보상과 예방, 30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등록 2015-08-11 18:43

1986년 서울 구로동 구로시장 한 귀퉁이에 ‘구로의원’이 설립됐다. 보건의료인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세운 노동자 건강 전문 병원이었다. 의사 몇 사람과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산업재해에 관한 공부를 했다. 우리나라 노동법의 직업병 인정 기준이 수십년 전 일본 노동법의 기준에서 한 틀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다른 나라들이 직업병 인정 기준을 시대에 맞추어 계속 바꿔오는 동안 우리는 수십년 전의 기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8년 15살 소년 문송면군이 두 달 동안 온도계 제조 일을 하고 수은에 중독돼 뼛속까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동과 건강 연구회’ 사무실에 모여 직업병 인정 요구 집회를 준비하다가 “송면이가 죽었습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울며불며 병원으로 달려가며 사람들은 “송면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같은 해 보건의료인·노동자·활동가들이 모여 ‘제1차 산업안전보건활동을 위한 공동교육훈련’을 열었다. 첫날 소개 시간에 한 손에 검은 장갑을 낀 청년이 자기 순서가 되자 “장갑 좀 벗어도 될까요?” 말하고는 한쪽 손과 입을 사용해 장갑을 벗으려고 애썼다. 옆자리에 있던 내가 얼른 청년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마이크를 받아 쥐었다. 장갑 속에서 나온 청년의 오른손은 손가락 다섯개가 모두 잘려 나가고 없었다.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고 마음 약한 사람들은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손을 든 청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처럼 사고를 당해 다친 사람은 그래도 산재로 인정돼 보험 처리가 됩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공장에 다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골병든 노동자는 좀처럼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해 산재보험 처리가 되지 않습니다. 치료비 한 푼도 안 나와요. 여기 훌륭하신 의사·간호사 선생님들이 많이 오셨는데요, 일하다가 직업병에 걸려 찾아오는 노동자가 있거든 친절하게 잘 대해 주세요.”

그것뿐이었다. 그 청년은 자기가 억울하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다음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우리나라에서 직업병을 인정받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직업병을 ‘인정’하고 ‘보상’하고 ‘예방’하는 실태가 3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최근 삼성전자의 1천억원 기금 조성과 공익재단 설립 거부 결정이다. 삼성전자 노동자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8년이 흘렀다. 그동안 100명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고 200명 넘는 사람들이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것이 피해자 쪽의 주장이다. 우여곡절 끝에 삼성전자, 가족대책위원회, 반올림 3자가 참여하는 조정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그 위원회의 권고안에 따르는 것으로 사건 해결의 가닥이 잡히기를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7월23일 발표된 조정위원회 권고안 내용의 큰 두 줄기는 기금 마련과 공익법인 설립이었다. ‘보상’과 ‘예방’이라는 사건 해결의 두 방향을 미흡하게나마 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후 삼성전자는 기금은 출연하겠으나 공익법인은 설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동안 주장해온 ‘삼성이 정한 기준에 따른 보상’과 ‘삼성이 자체적으로 알아서 하는 재발 방지 대책’을 고집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산재 예방에 대한 투자는 비용을 따지는 시장경제의 시각으로도 회사 경영에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들을 앞서 실천하는 것도 선진 기업의 면모를 살리는 길이다. 삼성은 이제라도 공익법인 설립에 적극 나서는 것이 옳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황상기씨는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의 뒷좌석에서 숨진 딸의 눈을 감겨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네 죽음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보상’뿐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킬 수 있는 ‘예방’의 기초를 마련하려고 노력해 왔다. 문송면·황유미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정위원회 성과가 무산되지 않도록 온 힘을 모으자.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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