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는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있는가. 능력 이전에 그럴 생각이 있기나 한 건가. ‘유승민 숙청’을 보면서 드는 근본적인 의문이다.
‘유승민 숙청’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대표적 보수개혁론자인 유 의원의 좌절은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이 더욱 암담할 것임을 예고한다. 유 의원 사퇴로 개혁 보수의 큰 축이 무너진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유 의원은 사퇴하면서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가치를 강조했다. 유 의원의 이런 결기에 많은 사람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를 놓고 “보수의 희망을 봤다”고 치켜세우는 건 좀 섣부른 것 같다.
유 의원의 소신정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직을 물러나면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중앙선관위 사이버테러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는 사이버테러 사태에 대해 사죄하고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으로 떠나간 민심을 되찾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지키지 못했음을 반성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번 사퇴문과 판에 박은 듯이 닮았다. 그러면서 한나라당에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 뒤 한나라당은 얼마나 바뀌었나. 한나라당은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한 뒤 김종인·이상돈 등 개혁적 인사들을 영입하고, 당명까지 새누리당으로 바꾸는 등 ‘개혁 코스프레’를 멋들어지게 해냈다. 내친김에 경제민주화라는 진보진영의 단골 의제까지 선점하면서 2012년 대선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런 뒤 이 나라 보수가 보인 행태는 어떠한가. 민주주의를 60~70년대로 후퇴시키고, 재벌 위주의 경제체제를 온존시켜 서민·중산층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공안통치를 통해 국민의 일상생활을 옥죄고 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을 총체적으로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3년 반 만에 더 퇴보한 보수의 민낯을 보면서 유 의원은 아직도 보수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할까.
‘유승민 숙청’을 대놓고 반대했던 정두언 의원도 대표적 개혁파 중 한 명이다. 그는 2011년 10월 펴낸 <한국의 보수, 비탈에 서다>라는 책에서 위기에 처한 보수의 혁신을 강도 높게 주장했다. ‘무엇을 하려고 정치를 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민주주의 완성을 위한 헌신’을 제일 먼저 꼽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헌법의 기본인 삼권분립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는 나라’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원내대표 찍어내기를 보면서 정 의원이 느꼈을 참담함은 짐작이 가고 남는다.
두 사람과 한길을 걷다 갈라선 개혁적 보수 정치인이 또 한 명 있다. 김성식 전 한나라당 의원이다. 그는 보수 개혁에 한계를 느끼고 2011년 12월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그는 ‘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국익과 민생을 챙기지 못하는 낡은 정치판 자체를 바꾸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정치의병이 되고자 한다’며 풍찬노숙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 새정치연합 공동위원장으로 안철수 의원과 함께 제3지대 신당을 모색했으나 새정치연합이 사실상 민주당에 흡수되면서 안 의원과 결별했다. 잠시 정치 현장을 떠났던 그는 최근 정치의병의 깃발을 다시 들고 나섰다. 기존 정치구도에 안주하지 않는 정치의병 그룹을 만들어야 근본적인 정치 혁신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김 전 의원과 달리 아직도 보수 개혁에 희망을 걸고 있는 유 의원과 정 의원의 진정성을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비탈에 선 한국 보수를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버팀목 역할만 했을 뿐 보수를 진정한 개혁의 길로 이끌어내진 못했다.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대신 국민들이 보수도 개혁 능력과 의지가 있는 것 같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꼴통 보수’가 아직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데 일조해 왔다.
누구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현실에서 검증될 것이다. 어느 경우든 쇄신파들이 꼴통 보수의 개혁 코스프레에 들러리 서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면 결과적이든.
정석구 편집인 twin86@hani.co.kr
정석구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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