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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소연의 볼록렌즈] 꿀물의 주인

등록 2015-07-13 18:47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는 것마저 성가시게 느껴질 정도의 폭염이었다. 왁자지껄하던 놀이터마저 텅 빈 오후였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분리수거함으로 다녀왔다.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1층 현관 앞 계단에서 할머니 한 분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옆에는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놓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너무 덥네요” 하며 한 손으로 빗자루를 꼭 안아 쥐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냉장고를 열었다. 냉수를 컵에 콸콸 따른 다음, 냉동고에서 얼음을 꺼내어 가득 채웠다. 꿀을 듬뿍 넣어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마시려다, 컵을 들고 다시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보았지만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컵 속에서 달그락거리던 얼음들은 작아져갔다. 다시 1층 현관으로 나가 바깥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컵을 내려다보았다. 꿀물의 주인은 어디로 간 걸까. 컵 속엔 얼음들이 모두 녹아 있었다. 바닥은 갓 걸레질을 마친 자국이 선연했다. 등을 기대지도 못하는 계단참에 앉아서 10분도 쉬지 못한 채, 다시 ‘영차!’ 하고 일어나 빗자루질을 하고 걸레질을 했을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를 대신해서 나는 꿀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시원했다. 할머니가 내게 준 꿀물 같았다. 빈 컵을 들고 집에 들어와 청소를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하며 땀을 실컷 흘렸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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