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고서 ‘아, 이거다!’ 했던 책을 구했다. 이런 주제로 누가 면밀한 논리를 펴주었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읽어야 할 다른 책들을 저편에 밀쳐두고 차례부터 펼쳐 보았다. 과학자, 사회학자, 인문학자 등이 두루 필자로 참여하여 소주제를 하나씩 균형 있게 맡았다. 서문에서부터 기대를 가득 품었다. 하지만 앞에 실린 과학자의 글을 두 편 읽고서, 이 책을 누군가에게 권할 일은 없겠다며 한숨을 쉬게 됐다. 전하려는 내용이 기대한 것과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면밀한 논리가 부재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문체가 지나치게 구태의연했기 때문이었다. 문장이 성기고 딱딱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이 좋은 내용을 이렇게밖에 전달할 수 없었던 걸까 하는 아쉬움이 커져갔다. 실망스러움은 언제고 이런 식으로 찾아왔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종종 반감부터 생기던 일도 비슷한 경우였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어법에 대한 고민을 좀처럼 안 하는 걸로 보인다. 말투가 거슬려서 거부감부터 들고, 말의 내용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는 걸 모르고 있지는 않다. 옳은 이야기를 한다는 자부심이 너무 클 뿐이다.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함이 때로 사랑하는 방법을 궁리할 줄 모르듯이 말이다. 식상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기 위해 옳은 이야기야말로 더 많은 궁리가 필요하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볼 참이다. 옳은 이야기를 대하는 예의를 다하고 싶기 때문이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