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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오철우의 과학의 숲] 2년여 만의 기지개, 빅뱅머신 시즌2

등록 2015-05-28 18:26수정 2015-08-04 00:50

무려 5000명 넘는 저자가 함께 쓴 한편의 과학논문이 최근 화제였다. 논문은 33쪽인데, 저자 이름만 24쪽을 빼곡히 다 채웠다. 저자 5154명은 ‘힉스’ 검출 실험에 참여한 세계 물리학 연구자들이고, 이색 기록의 논문을 실은 학술지는 현대 물리학사의 산증인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다. 얼마 전엔 1014명의 과학자가 이름을 올린 ‘초파리 유전체’ 논문도 화제였는데, 모두 다 연구단이라는 대표 이름에 가려질지 모를 개인의 땀을 일일이 기록하기 위함일까?

저자 중엔 한국 물리학자도 여럿 있다. 한국시엠에스(CMS)실험팀 대표인 최수용 교수(고려대)한테 들어보니, 5154명의 저자들 사이엔 대표 저자가 따로 없다고 한다. 모두 동등한 저자로 참여해 때론 그룹별로 토론하고 때론 각자 의견을 제시하고, 그러다 보니 9쪽 논문은 무려 3년 걸려 완성됐다고 한다. 이 연구단에선 수백편의 논문이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진행됐거나 진행중이다.

화제가 된 논문의 산실은 힉스 발견으로 널리 알려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이다. 스위스 제네바 부근 땅속에 건설된 길이 27㎞의 원형가속기에선 세계 1만명 넘는 연구자들이 협동하며 거대장치를 운영하고, 1초에 수억번 하는 입자충돌 사건의 데이터를 모으고 거르고 분석하며, 논의를 모아 새로 확인하거나 발견한 지식을 논문으로 세상에 발표한다. 그러면서 우주 만물의 기본입자와 힘을 더 정교하게 이해하려는 입자물리학 이론을 다듬고 있다.

이곳이 다시 주목받는다. 힉스 검출 실험 이후에 정비와 성능 향상을 위해 휴식에 들어간 지 2년여 만이다. 이른바 ‘빅뱅머신’은 시운전을 마치고 이제 며칠 뒤면 정식 가동해 ‘빅뱅머신 시즌2’를 시작한다. 그러면 다시 입자물리학 지식의 생산지로 주목받을 테고,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기본입자, 새로운 입자붕괴 반응이 검출되리라는 기대도 높아질 것이다. 능력이 더 커진 빅뱅머신에선 더 많은 힉스 입자가 만들어질 테고, 힉스에 이어 암흑물질 후보 입자나 초대칭 입자, 미니블랙홀처럼 이론에서나 나오는 낯선 존재를 찾는 입자 사냥도 가속화할 것이다. 과연 현대우주론을 설명하는 표준모형의 남은 약점을 보완할 새 입자나 반응은 검출될 것인가, 이것이 최대 관심사다.

힉스의 인기가 너무 컸던 탓일까? 가속기의 재가동은 첫 가동 때보다는 덜 주목받는 듯하지만, 물리학자들은 “사실 본경기는 이번 가동”이라고 말한다. 더 빠르게 가속된 양성자들끼리 충돌해 산산이 기본입자들을 만들어내는 찰나의 충돌 에너지는 이전(8테라전자볼트·TeV)보다 1.5배나 높아진 13테라전자볼트인지라, 이전과 아주 다른 현상이 나올 가능성도 덩달아 높아졌기 때문이다.

왜 물리학자들은 더 큰 충돌 에너지에 열을 올릴까? 초기 우주는 엄청나게 큰 고에너지의 세상이었으니, 빅뱅머신에서 고에너지를 구현할수록 초기 우주 상태에 좀더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 우주에 찰나로 존재했다가 사라진 입자나 힘의 작용을 엿볼 기회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오철우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오철우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새 입자 발견이 거대과학의 드라마라면, 수많은 입자물리학 연구자는 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자이자 현장 스태프다. 이들은 입자충돌기를 ‘허브’로 삼아 네트워크를 이루며 협업하고 분업한다. 거대장치를 수선하며 센서와 소프트웨어를 개량하고, 정밀한 데이터를 검출하고 걸러내려는 분투는 3년간의 시즌2에서도 계속된다. 최 교수는 “연구그룹들이 같은 주제와 목표로 협업하지만 최초 발견과 정밀 데이터를 두고 경쟁도 만만찮다”고 전했다. 빅뱅머신 시즌2를 앞두고 긴장과 기대, 설렘은 커진다.

오철우 스페셜콘텐츠팀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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