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계절이다.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 입양의 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관계를 기리고자 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검색창에 ‘가정의 달’을 치면 “이통사, ‘가정의 달’ 가족 연계 다양한 상품 선보여” “포털업계 가정의 달 어린이 콘텐츠 눈길, 사랑하는 자녀에게 마음을 전하고, 평소에 갖고 싶던 인기 제품도 구매할 기회” “‘가정의 달’ 자녀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 행사는?” “어린이날 선물 순위” 등의 홍보문건만 가득하다. 독신 가구가 25%에 이르렀고 삼포세대 청년들이 날로 늘어나는 요즘, 가정의 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 달일까?
최근 극장 상영 중인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이 시대의 가정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밀리언셀러를 영화화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서른다섯살의 카페 매니저 수짱이다. “못 해요, 못 들겠어요, 해주세요”라고 애교를 피울 줄 모르는 그녀는 월급이 많지도 않고 노후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만, 손님들이 좋아할 메뉴를 만드느라 고심하고 후배도 챙기면서 카페라는 삶의 공간에서 하는 일을 즐긴다. 게다가 마음 맞는 친구도 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서른아홉살의 웹디자이너 사와코는 독립을 하고 싶지만,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보는 엄마를 차마 떠나지 못한다. 그녀는 결혼해서 가족을 이룬 남동생이 다니러 왔다가 알아보지도 못한다며 할머니께 인사를 않고 떠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동창과 급속도로 친해지면서 결혼할 마음을 먹어가던 중 손주를 빨리 보고 싶은 부모님이 임신 가능 진단서를 받아오라고 한다는 애인의 말에 헤어진다. 또 한명의 친구인 유능한 커리어우먼 마이짱은 얌체 같은 후배들과 부려먹기만 하는 상사 사이에서 치이고 유부남과의 연애로 힘들어하던 중 연애를 정리하고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남자를 구해 가정을 꾸린다. 마이짱은 결단력 있고 계산이 빠른, 실은 직장에 남아 사장이 되어야 할 인물이다.
마음에 있던 남자를 잡지 않고 남자를 잘 다루는 동료에게 밀어 보낸 뒤 혼자 할머니가 되어 있을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기도 하지만 수짱은 먼 미래에 대한 걱정이 지금 이곳에 있는 자신을 구차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와코 집을 방문한 수짱은 할머니께 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한다. 정성스럽게 자신을 할머니께 소개하고 잘 놀다 가겠노라 절을 하자 잠속에 빠져 있던 할머니가 깨어나 웃으며 잘 놀다 가라고 한다. 얽혀진 인연에 누구보다 충실한 수짱과 사와코, 이 둘은 실은 누구보다 좋은 엄마와 아내가 될 사람들인데 가정과 멀리 있다. 누구보다 훌륭한 아버지가 될 능력과 성향을 가졌지만 쉬는 날에 송일국의 세쌍둥이가 나오는 프로그램이나 보면서 즐거워하는 내 조카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이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는 아버지와 매일 식탁을 차리고 아이들을 기다리던 대기조 어머니들은 사라지고 있다. 경제성장과 발전이 재앙으로 돌아오는 시대, 위험이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시대가 도래했고 섣불리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리스크를 더욱 높일 뿐이다. 치밀한 계산 아래 위험요소를 통제하고 관리하느라 바쁜 부부가 만들어내는 가정은 때로 비정한 사회보다 더 비정하다. 계속 달리다 러닝머신 위에서 죽을 것 같은 아버지들이 막막한 밤이면 인터넷 사이트에서 분노의 화신으로 변신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명문대를 보내려면 ‘사회성’과 ‘창의성’을 멀리하라는 매뉴얼대로 자란 아이들은 우연과 인연이 만들어내는 삶의 기쁨과 윤리적 태도를 어디서 배울까?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가정은 쓸모를 따지지 않는 차원의 관계들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아이를 지배하지 않으면서 주체화시키는 모성, 스스로 삶을 살아낼 자녀를 위해 환대의 장을 보여줄 부성이 자라는 곳이다. 가정의 달에 섣불리 가정을 꾸리지 않는 이들이 많은 것을 돌이켜보게 한다.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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