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에는 대통령이 ‘없다!’ 외국 방문으로 인한 청와대의 ‘대통령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부를 만한, 국민의 아픔을 함께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이 없다는 말이다. 오죽했으면 박근혜 대통령이 남미 순방을 떠나는 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등에 ‘돌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라는 전단이 뿌려졌을까. 국민은 이제 박 대통령에게 걸었던 실낱같은 한 가닥 기대와 신뢰마저 거둬들이고 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는 박 대통령과 박 정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필 제삿날에 외국으로 도피하듯 훌쩍 떠난단 말인가. 그래도 1주기 추모는 했다는 사진이라도 남기려는 듯 유가족마저 떠나버린 팽목항을 찾아 경호원 호위 속에 허공에 대고 추모사를 낭독했다. 차라리 일정이 바빠 그냥 출국한다고 했으면 희생자들이 두 번 모욕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떠난 뒤 이어진 참사 1주기 추모집회는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경찰은 불법폭력 시위라서 엄정 대처했다고 하지만 그런 원인을 누가 먼저 제공했는가. 유가족과 시민들을 차벽으로 원천봉쇄한 것은 경찰이었다. 정부도 참사 1년이 지나도록 진상을 밝히기는커녕 유가족들을 돈이나 챙기려는 사람이라고 비아냥대면서 경원시했다. 겨우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됐지만 온갖 핑계를 대며 조사위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게 박근혜 정부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이런 와중에 터진 ‘성완종 리스트’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를 설명해 준다. 성 회장이 죽음으로써 증언한 내용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이 온통 썩은 내 나는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에다 현직 총리, 박 대통령 측근들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부패로 얼룩진 인사들이, 온갖 불법비리 때문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덮어두려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자신이 명징하지 않으면 세상의 진실을 대하기가 두려운 법이다.
‘성완종 리스트’로 박근혜 정부는 집권 뒤 최대 위기를 맞았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4·29 재보선을 앞둔 새누리당도 국민 앞에 허리를 굽히며 몸을 낮추고 있다. 동반자인 보수언론들도 위기감을 표출하며 박근혜 정부에 쇄신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통의 대명사인 박 대통령이 이번 기회에 과연 바뀌게 될까? 새누리당도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떨치고 환골탈태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통령과 집권여당으로 돌아올까?
진심으로 그러길 바란다. 그러지 않고 또다시 꼬리 자르기 식으로 이 국면을 적당히 넘기려 한다면 앞으로 남은 임기 3년은 정말 대통령 없는 불행한 3년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지시나 명령이 먹혀들지 않고, 일상적인 국정은 마비되고, 국민은 각자도생하느라 허덕이는 그런 끔찍한 나라에서 누가 편히 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 정부가 개과천선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다. 경찰은 세월호 폭력 시위 주동자 등을 엄벌하겠다며 사법처리에 착수했다. 이러다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커녕 자식 잃은 유가족이나 희생자들을 추모하려는 시민들이 거꾸로 범죄자로 몰릴 판이다. 이건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성완종 리스트’도 실체를 제대로 드러낼 것 같지 않다. 새누리당은 국민의 인내심이 바닥난 이완구 총리와 아이들 밥그릇을 빼앗아 민심을 잃은 홍준표 지사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고 넘어갈 태세다. 일부 친여 언론과 여당 의원들은 야당 의원도 리스트에 포함됐다며 물타기 작전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대형 부패사건이 터질 때마다 봐왔던 익숙한 풍경이다. 검찰 수사에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보지만 아직은 글쎄요다.
일주일 뒤면 대통령이 귀국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에 대통령이 ‘있게’ 될까. 그것은 박 대통령 자신에게 달려 있다. 돌아와서도 출국할 때의 그 모습 그대로라면 우리는 ‘대통령 없는 나라’에서 3년을 살아낼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정석구 편집인 twin86@hani.co.kr
정석구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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