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인 1965년에 시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보릿고개가 실감나던 후진국 때다. 점심시간에는 전교생이 빈 도시락통을 들고 줄서서 가마솥에 끓인 강냉이죽을 타 먹었다. 한번 더 타 먹으려고 다시 줄을 섰다가 들켜 꿀밤 맞는 아이도 있었다. 똑같이 누리는 점심시간은 시시한 즐거움의 일상이었다.
4년 뒤 대도시로 전학을 갔다. 거기선 강냉이죽이 아니라 부풀린 옥수수빵과 우유가 급식으로 나왔다. 몇 명에게만 돌아갈 몫이었다. 담임선생이 가난한 학생들을 특정해서 그들에게만 빵과 우유를 제공했다. 내 가정 형편상 옥수수빵을 타 먹는데, 시골에서 강냉이죽을 먹을 때와는 분위기와 느낌이 무언가 달랐다. 한편에 찜찜함이 남았는데, 아마도 가난의 “낙인”이 소리없이 목구멍에 걸리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런 찜찜함 탓인지, 학교 무상급식 추진은 무척이나 반가운 처방이다 싶었다. 여러 논란과 시행착오를 거쳐 이 제도는 학생 복지의 한 부분으로 착근되었다. 그런데 무슨 정치적 꿍꿍이속인지 학교급식이 새롭게 정치쟁점화하고 있다. 심지어 경상남도는 무상급식을 중단하는 조례까지 통과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선 개념부터 바로 세우자. “무상급식”이라니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고 따진다.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런데 의무교육을 실현할 책임은 바로 국가에 있다. 의무교육 제대로 하려면 공부와 함께 밥도 의무적으로 챙겨줘야 한다. 의무입대하는 군인들에게 피복과 식사는 당연히 지급되듯이 말이다. 의무교육제하의 학교급식은 “무상급식”이 아니라 국가의 지급의무가 수반되는 “의무급식”이다. 학생들에게 식사는 교육을 위한 전제이고, 그 자체가 교육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니 기본교육의 일부로서 “기본급식”이다.
“무상”급식을 폐지하자는 쪽은 예산의 효율적 배분을 내세운다. 그런데 같은 교실에서 밥 먹는 아이들을 유상파와 무상파로 쪼갤 때, 거기에 소리없이 차별의 낙인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자신의 가난을 입증하여 자녀에게 눈칫밥 먹게 할 부모의 속쓰림도 느끼지 못하는가. 부모와 자녀에게 남기는 자기모멸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급우들끼리 웃고 떠드는 점심 자리에 서늘한 위화감을 조성한 잘못을 느끼지도 못하는가.
몇십년의 교육 경험을 토대로 학생 교육에서 가장 유념해야 할 덕목이 뭐냐고 내게 물으면,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라 답하겠다. 참으로 좋은 선생이 누구였던가를 자문자답해보라. 지식, 외모, 인기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주고 믿어준 선생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자존감이 낮으면 성취동기도 낮아지고, 학교 가는 즐거움도 사그라든다. 자존감이 높은 학생은 주변 환경이 열악해도 이를 극복해낼 내적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런데 평등존중급식이 아닌 차별낙인급식은 학생의 자존감에 매일같이 생채기를 낸다. 자존감에 상처받는 학생에게 학습비 몇푼 안겨줘봐야 성적은 물론이고 다른 의미있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심지어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언사까지 예사로 한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그와 다르다. 엄마는 자녀가 귀가하면 오늘 밥 잘 먹었느냐부터 묻는다. 성적 갖고 야단치다가도 밥은 반드시 챙긴다. 학교에서 점심은 위장을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친구들과 환담이 오가는 소중한 교육시간이다. 대통령은 국민 밥챙기기, 도지사는 도민들 밥챙기기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사람 살림의 대본(大本)인 밥 먹는 것의 소중함과 교육적 가치도 모르는 자는 행정지사의 자격이 없다.
아이들 밥값 갖고 정치가들이 몇년째 논란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우리 경제 형편이 애들 밥도 골고루 못 먹일 정도로 확 나빠진 것도 아니다. 차별의 낙인이 찍힌 눈칫밥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를 리 없거니와 학생의 장래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아이들 골고루 제대로 먹이면서, 학습 기회도 골고루 충족할 방책을 강구하는 게 무에 그리 어렵단 말인가. 자고로 아이들 밥그릇 갖고 장난치는 게 아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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