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편집인
세금은 정치다. 겉으론, 공평해야 하고 소득재분배 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등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지만 세금의 본질은 정치다. 정치·경제적 이해를 달리하는 세력 간의 힘의 관계가 수치로 반영된 게 세금이다. 그래서 어떤 사회의 조세체계를 잘 들여다보면 그 사회의 여러 세력 간 힘의 관계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최근 가열되고 있는 증세 논쟁도 우리 사회의 정치세력 간 역학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에게 부담 주는 증세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했지만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보면 세금이 얼마나 정치적인지 적나라하게 대비된다.
종합부동산세 논란이 대표적이다. 서민 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과다 보유자에 대한 과세 강화 등을 목적으로 2005년 6월 종부세를 도입했다. 부동산 부자들이 극렬하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언론들은 세금폭탄론을 동원해 노무현 정부를 융단폭격했다. 결국 자산가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명박 정부 들어 종부세는 사실상 제 기능을 잃었다.
애초 계획대로 종부세가 시행됐다면 해마다 3조~4조원이 걷힐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종부세 세수는 2006년 1조3천억원에서 2007년 2조4천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2조1천억원으로 줄어든 뒤 2009년부터 지금까지 연간 1조원대 초반을 유지하고 있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종부세 무력화로 2009~2013년 5년 동안 13조9천억원의 종부세가 줄어든 것으로 추계한 바 있다. 부동산 부자들의 주머니는 그만큼 두둑해졌다.
법인세도 마찬가지다. 친기업 정책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부는 2009년 25%(과표 2억원 초과 기업)였던 법인세율을 22%로 낮춘 데 이어 2012년 다시 20%로 인하했다.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을 보면, 이명박 정부의 법인세율 인하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법인세 감소액은 37조2천억원이었다. 그만큼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넉넉해진 셈이다. 그렇지만 법인세 인하 목적이었던 기업 투자 증가나 경기 활성화 효과는 거의 없이 세수만 축내고 말았다.
그사이 개인들이 내는 소득세는 점차 늘어나 전체 규모에서 법인세를 넘어섰다. 지난해 근로소득세와 양도소득세 등을 합친 소득세 징수액은 53조3천억원으로 42조7천억원인 법인세보다 10조원이 많았다. 기업들이 덜 낸 세금을 개인들이 보충해 준 꼴이다. 이런 현상은 경기 부진으로 법인세수가 줄고 소득세는 성격상 자연 증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명박 정부 이후 기업들이 세제상 우대를 받은 탓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증세 없는 복지’ 논쟁을 들여다보면 그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도 드러난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부담을 내세워 한사코 증세를 않겠다고 강조하지만 증세를 하게 되면 누가 더 큰 부담을 질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 의도는 뻔하다. 두루뭉술 ‘국민’이라고 하지만 실제 증세를 할 경우 주로 부담을 지게 되는 층은 대기업과 자산가들이다. 그들은 박근혜 정부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그러잖아도 잦은 인사 실책과 무능으로 지지도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지지마저 잃게 되면 정권 존립 자체가 힘들어질 수 있다. 그런 마당에 이른바 ‘부자 증세’를 한다는 것은 박 정부엔 치명적인 자해행위가 된다. 박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결국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부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부자 증세’를 박 정부에 아무리 압박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역학 관계에 변화가 생길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최근 증세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것은 공고했던 기존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금이 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정치·경제적 권력 지형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부자 증세’의 실현 여부는 그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석구 편집인 twin86@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