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벡 선생이 연초에 세상을 떠났다. 70의 나이. 그는 누구보다 현 인류가 처한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노력해왔고 특히 그의 ‘위험사회론’은 한국 상황을 설명해주는 주요한 개념 틀이 되어 주었다. 작년 방한 중에 그는 한국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라는 파국의 경험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갈 근원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면서 그런 훌륭한 질문에 훌륭하게 응답하지 못하는 정부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벡이 제시하는 이론의 핵심은 근대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류가 파국을 맞고 있지만 이를 ‘해방적 파국’으로 전환하면서 문명적 ‘탈바꿈’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 말 극심한 혼란과 빈곤을 딛고 유럽 주민들은 과학기술 혁명과 근대 국민국가 형성을 통해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성공의 노하우를 전세계에 퍼뜨리면서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근대화 프로젝트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성공은 엄청난 부작용과 부산물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원자력발전 등으로 인한 재앙과, 일상화된 위기 속에서 국민들의 내면이 깨져나가는 재난으로 이어졌다. 벡은 이제 ‘부’가 아닌 ‘위험’(risk)의 개념을 바탕으로 제2의 근대, 곧 성찰적 근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했다. 누구도 안전하게 살 수 없게 된 지구에서 그간의 시스템을 ‘리콜’하면서 시장과 국가와 과학과 공공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며 지속가능한 삶의 새판을 짜자는 것이었다. 배고픔의 시대를 벗어나 국민총생산(GNP) 1만달러 사회가 되면 더 이상 지엔피를 올리려 하기보다 리스크를 줄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과 의심, 공포와 적대감 가득한 사회에서는 경제 생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찰적 근대화 과정에 들어선 국가는 솔직해져야 한다. 앞으로 닥칠 재난과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시스템의 역부족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협력을 구하는 거버넌스를 만들어가야 한다. 최근 스위스 정부는 원전 사고 위험지대를 반경 20㎞에서 50㎞로 확장하고 그 지대에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비상약 요오드화칼륨 정제(알약)와 함께 위험지대에 살고 있음을 알리는 공식통지문을 보냈다고 한다. 사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원전을 계속 안전하다고 우기는 한국과는 참으로 대비되는 모습이다. 문명적 탈바꿈은 쉽게 일어나지 않고 금방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벡은 그간 축적된 위험은 쉽게 통제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수시로 사건들은 터질 것이지만, 그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을 통해 전 국민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학습을 하면서 서서히 탈바꿈을 이루어낼 것이라 하였다. 한국에서는 작년에 그런 학습의 자리가 수시로 열렸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100일 추모 음악회도 그런 자리였는데 그때 가수 이승환은 마치 벡의 이론을 풀듯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너무 많이 알아차려서 불쌍한 국민이 되어버렸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혹은 지켜주지 않는 국가의 무능함과 무심함을 알아채 버린, 국민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지 않으려는 그런 의지를 가진 이상한 곳임을 알아채 버린….” 국가주의가 어느 나라보다 강했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세월호 사태를 통해 엄청난 학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벡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며 지구상의 주민들이 공동운명체적 감각을 가지고 즐거운 학습을 통해 위기가 일상화된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을 촉구하며 가셨다. 그처럼 따뜻하게 시대를 감싸면서 냉철한 시대 인식을 가진 학자와 정치가와 관료들이 북유럽에는 많을까? 위험 사회적 성격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진 유럽의 정치가와 관료들, 국가의 보호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보수적이지만 성찰적인 유럽 주민들, 시대 학습을 통해 탁월한 시민/난민 의식을 키워가고 있는 한국 주민들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만간 울리히 벡을 기리며 시대의 난감함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기 바란다. 청명한 기운으로 탈바꿈할 지구의 삶을 위해 올해, 한국 주민들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