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편집인
‘정윤회 국정개입 보고서’가 결국 찌라시로 정리되는 모양이다. 문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문건에서 언급된 내용이 실체가 없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문건 유출 경위를 수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하니 예상했던 대로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을 “찌라시 같은 얘기”라고 진즉 ‘지침’을 내렸는데 검찰에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검찰의 행태로 볼 때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나라가 제자리를 찾아갈 것 같진 않다. 박 대통령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그동안의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제2, 제3의 ‘문건’과 ‘증언’이 터져나올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국정 운영의 동력을 잃게 된다. 박 대통령 또한 실패한 대통령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나라가 이 지경에 빠진 근본 원인이 박 대통령의 불투명한 국정 운영과 소통 부족 때문이라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박 정부 출범 이후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는 숱한 충고와 비판이 제기됐는데도 박 대통령은 꿈쩍 않고 보란 듯이 제 갈 길을 갔다. 그 결과 정윤회와 ‘문고리 권력 3인방’이라는 비선 실세들의 국정 농단 사태가 불거졌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비서관 3인방은 그저 심부름하는 사람이고, 정윤회도 ‘내 옆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인데 무슨 권력 다툼이냐며 이들을 치마폭에 감싼다. 국민과의 인식 차이가 너무 크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은 비밀주의로 일관하면서 정부의 투명성은 유난히 강조한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엊그제 국무회의에서 “부정부패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 내 업무 시스템이 더욱 투명하게 바뀌어야 한다”며 “국민들이 정부에서 하는 일들을 투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국정 운영을 정상화하려면 대통령과 청와대부터 투명해져야 한다는 주문도 지겹도록 들었을 것이다. 야당뿐 아니라 많은 정치학자, 언론 등에서 반복해온 얘기들이다. 엊그제 새누리당 쇄신의원 모임이라는 ‘아침소리’ 소속 의원들이 이를 잘 정리해 놓았다. 청와대의 인사 투명성 강화를 위해 인사 시스템을 혁신하고, 인사추천 실명제를 도입해 특정 인사를 누가 추천했는지를 공개하는 방안 등을 제안했다. 소통 강화를 위해서는 대통령 서면보고를 최소화하는 대신 대면보고를 일상화하고, 대국민 기자회견을 정례화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설득력 있는 처방이다. 박 대통령에겐 쇠귀에 경 읽기로 들리겠지만.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권력의 사유화도 나라 꼴을 망가뜨리고 국민을 절망케 한다. 민주사회에서의 정치권력은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범위 안에서 공적이고 제한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런데도 권력을 사적 이익을 위해 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관 등 고위직뿐 아니라 공기업 임원 등 힘 있고 돈 되는 자리를 개인적 친분이나 학연, 지연으로 얽힌 인사들로 채우는 게 대표적이다. 권력을 자기 패거리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셈이다.
비밀주의와 공적 의식 결핍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 둘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사회를 부패시키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다. 아무리 국가관이 투철하고 공인의식이 철저하더라도 아무런 감시나 견제도 받지 않는 장막 뒤에 있게 되면 검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그런 어둠 속에서는 주요한 국가 정책과 인사가 공적 조직이 아닌 ‘비선 실세’들에 의해 결정되고, 확인되지 않은 온갖 소문들이 난무한다. ‘정윤회 문건’은 비밀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이제 장막을 걷고 모든 걸 백일하에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얽힌 문제를 푸는 첫걸음이다. 썩은 냄새 풀풀 풍기는 곰팡이도 햇볕을 받으면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는가. 햇볕 아래 제일 먼저 썩은 몸을 드러내야 하는 이는 누구일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다.
정석구 편집인 twin86@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