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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메리 바튼

등록 2014-09-18 18:46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 이면에 존재하던 사회적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곤궁한 삶을 조명한 소설가다. 아이들을 키우며 주부로 살다가 마흔이 다 되어 첫 소설을 산출한 그를 단지 불리한 여건에서 글을 썼기에 주목받는 아마추어 정도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메리 바튼>이 나온 뒤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그의 문재를 인정하여 13년간 자신이 주관하던 문예지에 연재 지면을 할애한 사실로 보건대 그런 시각은 편견에 의한 폄하임을 알 수 있다. <남과 북>은 그 잡지 연재의 산물로 디킨스가 제목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개스켈은 산업혁명 시대의 실상을 찾으려는 역사가들이 가장 많이 찾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디킨스나 칼라일보다 극빈층의 삶에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삶의 이야기’라는 <메리 바튼>의 부제는 새로운 산업화를 상징하던 도시 맨체스터에서 펼쳐지는 계급 간의 시각의 차이를 암시한다. 개스켈은 상층부의 안락함이나 하층부의 비참함을 과장하지 않는다. 어느 측으로도 기울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그려냈을 뿐이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주인공 메리의 아버지 존 바튼이 노동계급의 굴욕과 고독에 대해 늘어놓는 장광설은 경청할 만하다. “일할수록 우리는 그들의 노예지. 이마의 땀으로 우리가 그들의 재산을 쌓아놓잖아. 그러면서 우리는 디베스와 라자로처럼 건널 수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니까. 그렇지만 나중엔 우리 운명이 더 낫지.” ‘지금 그들이 좋은 것을 모두 가졌지만 내세엔 그들이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줄곧 해대는 존에게 화자로서 개스켈은 신랄한 목청을 높인다. “아직도 디베스와 라자로의 우화라니!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처럼 이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개스켈이 파악한 모든 사회악은 구성원 서로에 대한 무관심,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지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당연하게도.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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