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유나’를 위하여

등록 2014-08-26 18:34수정 2014-08-28 13:40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자
여름이 지나간다. 여행이라는 호사를 누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럴수록 여유를 가져야 한다며 서울을 떠나온 지 꽤 되었다. 여정을 푼 캘리포니아 중부 해변 마을은 가뭄이 심해서 이웃집 주부는 소변을 세 번 정도 본 뒤에 변기 물을 내리라 한다. 오랜만에 들른 매머스 스키장 동네는 몇 년째 적설량이 부족해 침체된 분위기다. 세계 어디에 가나 중산층이 사라지는 모습이 역력하고 이런저런 재난과 재앙으로 인류의 삶이 과연 지속가능할지 의문을 품게 한다.

 티브이에서는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흑인 소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을 둘러싸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연일 보여주고 있다. 사고 인근 지역에서 또 한명의 청년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져 분위기가 더욱 뒤숭숭한 가운데 총을 쏜 백인 경관을 지원하는 모금액이 희생자를 추모하는 성금보다 더 많아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모금 사이트에는 “약탈과 폭동을 일삼은 것을 변명하는 흑인들의 행위에 신물이 났다”는 등 인종차별적 반감이 여과 없이 올라와 삭제당했다고 한다. 비무장 상태인 소년을 무참히 살해한 경찰의 과잉 대응에 항의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퍼거슨시로 시위 인파가 모여드는 한편 경찰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표시로 저녁마다 집 현관의 파란색 등을 밝히며 윌슨 경관을 지지하는 행동 또한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 뉴스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미국 친구들은 2012년 12월 어린이 20명의 목숨을 앗아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수많은 국민들의 애도와 재발방지 요구로 의회는 총기 금지 법안을 마련하였고, 오바마 대통령은 행정부의 모든 권력을 동원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했었다. 그렇지만 미국총기협회(NRA)의 로비 등으로 결국 알맹이 없는 법안만 통과시켰다며 ‘무기상’이 지배하는 세상을 호락호락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난감한 사태는 사안의 내용은 달라도 유사한 구도를 보여준다. 세월호 사태도 마찬가지다. 특별법 제정을 놓고 40여일째 ‘유민 아빠’의 단식이 계속되고 가족 의료단을 포함한 동조 단식이 2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유민 아버지 저러는 건 해준 게 없어서 더 아프고……. 그런 일 당하면 얼마나 피눈물 나는지”라는 공감 어린 댓글을 보게 되지만 반대로 유민 아빠 흠집 내기에 혈안이 된 이들도 늘고 있다.

 결국 이런 대결에서 이기는 자는 누구일까? 승자는 지금 이 전쟁을 직접 치르는 이들이 아니라, 영화 <엘리시움>에서처럼 고지능 로봇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천국 같은 위성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높은 곳’ 어딘가에서 장기판을 두며 ‘정의’라는 이름으로 싸우는 감정적 인간들을 저급한 종자로 여기는, 뉴욕과 워싱턴 어디쯤에서 자주 회동하는 자본과 기술을 장악한 ‘무기상’들이 아닐까? 혼란이 가중될수록 그들이 세상을 장악할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승리와 패배’ 구도로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 우리가 익히 알아온 대결의 방식은 철 지난 것이며 새로운 게임의 룰을 찾아내야 할 때다.

다행히 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거대한 빙하의 움직임과 같은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앞에 눈물로 한 약속은 지키고 유민 아빠는 유민을 위해 죽기보다 동생 유나를 생각하며 잘 살아야 한다. 그분은 두 딸의 아빠이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아주 많은 아이들의 아빠이며, 이혼 과정을 겪은 한 남자이지만 이 땅에서 자녀를 제대로 사랑할 기회를 갖지 못한 아주 많은 남자를 대표한다. 나는 그의 용기와 사랑을 믿는다. 그 용기와 사랑으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이루어내야 하지만 그것은 그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적은 우리 안에도 편재해 있고 또한 보이지 않는 저 높은 곳에도 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유민의 친구들과 유나가 패배감 속에서 살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키우는 마음으로 세상을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자

김미화 “세월호 유가족 아픔 나누는 김장훈씨 나처럼 될까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1.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북한군 포로의 얼굴 [코즈모폴리턴] 2.

북한군 포로의 얼굴 [코즈모폴리턴]

[사설] 딥시크 충격, 한국도 빠른 추격으로 기회 살려야 3.

[사설] 딥시크 충격, 한국도 빠른 추격으로 기회 살려야

[사설] 반도체보조금 약속 뒤집으려는 미국, ‘불량 국가’인가 4.

[사설] 반도체보조금 약속 뒤집으려는 미국, ‘불량 국가’인가

[사설] 최상목, 내란 특검법 또 거부권…국회 재의결해 전모 밝혀야 5.

[사설] 최상목, 내란 특검법 또 거부권…국회 재의결해 전모 밝혀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