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우리 북반부 사람이 남조선에 가서 볼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조선 사람이 북조선에 오면 우리 사업의 정당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고 김일성 주석이 1954년 12월 남북교류와 관련해 한 발언이다. 당시 김 주석은 “남조선의 체육단이나 예술단을 보내려면 보내라. 우리도 보낼 수 있다”면서 체육교류 등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9월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 북쪽 선수단과 응원단의 참석 문제를 논의한 지난 17일 남북 실무회담 결렬 소식은 ‘박근혜 정부의 자신감’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결렬된 회담 내용이 ‘박근혜 정부가 60년 전 김일성의 발언조차 극복할 자신감도 없는 모양이구나’ 하는 씁쓸함을 남겼기 때문이다.
1946년 3월 경평축구대회를 끝으로 중단된 남북 체육교류 재개와 관련한 제안은 초기 북한이 주도했다. 북한은 1950년대부터 최고인민회의나 노동당 대회 등 다양한 자리에서 체육교류를 언급했다. 김일성 주석도 1972년 5월 극비 방북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올림픽경기대회를 비롯한 국제적인 체육경기들에 북과 남에서 우수한 선수들을 뽑아 단일팀을 구성”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남한은 이런 북한의 제안들을 대부분 ‘공세’로 치부하면서 무시했고, 일부에 대해서만 협상을 수용했다. 이런 태도는 어찌 보면 ‘김일성의 자신감’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의 현정화와 북의 리분희가 주축이 된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구성은 남한으로서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것이 남한 정부의 자신감 회복 신호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후 남쪽 정부는 쭉 자신감을 바탕으로 체육교류를 주도해왔고, 북도 자신감은 많이 약화됐을지 몰라도 ‘자존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대해왔다. 그것이 6·15 공동선언 이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 동시 입장 등 남북 체육교류에서 큰 진전을 이루어낸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이번 실무회담에서 남쪽이 보인 것은 ‘북한의 자존심은 뭉개고, 스스로는 자신감을 잃은 모습’이었다. 실무회담이 결렬된 날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남한 협상단이 “우리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우리 선수단과 응원단의 비용 문제를 꺼내들며 자부담이니 뭐니 하고 줴쳐대는 추태를 부리였다”고 폭로했다. 한마디로 남한 협상대표단이 “너희 돈 없지 않으냐. 돈도 없으면서 왜 그리 응원단은 많이 보내느냐”고 비아냥거리며 북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새다.
<조선중앙통신>은 또 남한 대표단이 “공화국기는 물론 ‘한반도기’도 큰 것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아마도 북한의 대규모 미녀 응원단이 경기장에서 대형 공화국기와 한반도기를 흔들면 남한 사회에서 북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참으로 자신감 없는 태도다.
교류는 서로의 긍정적 모습을 확인하고 넓혀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 긍정적 상호 인식의 확장을 통해 남북 긴장을 완화하는 게 교류의 목표다. 또 남쪽이 영향을 받으면 북쪽도 영향을 받는다. 한 예로 북의 퍼스트레이디 리설주가 2005년 인천에 응원단으로 와 남한의 실체를 직접 확인한 것이 북한의 남한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교류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신감이나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햇볕정책 등으로 우리가 쌓아올린 그 자신감을 도대체 어디다 팽개쳐버린 것일까. 이렇게 자신감도 없는 정부가 어떻게 ‘신뢰 프로세스’는 추진한다는 것일까.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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