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전략은 없고 땜질만 있다.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든 결과는 달라질 게 없다. 결국 책임은 대통령과 정부가 져야 한다. 정홍원 국무총리 유임만 그런 게 아니다. 북한 관련 정책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정부를 대표하는 대북정책은 통일대박론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나 드레스덴 선언은 어느새 통일대박론의 하위 개념이 됐다. 그런데 그 통일대박론이 정부의 손발을 묶는 덫이 되고 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는 북한붕괴론과의 결합이다. 박 대통령이 1월 초 새해 기자회견에서 처음 언급한 통일대박론은 애초부터 ‘방법론 없는 통일 포퓰리즘’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통일은 좋다. 하지만 거기까지 갈 경로가 분명하지 않다면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후에도 정부는 현실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았고 지금은 그럴 생각도 없는 듯하다. 그 틈을 메운 게 북한붕괴론이다. 최근 정부 안팎에서 활동하는 ‘통일담론 그룹들’ 가운데 다수는 북한 체제의 붕괴를 전제로 흡수통일 방안을 얘기한다. 북한붕괴론이 주가 되고 통일대박론이 종이 되는 양상이다.
둘째, 통일대박론이 대북 ‘무정책’을 합리화하는 언덕이 되고 있다. 핵 문제는 갈수록 악화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기다리는 전략을 고수한다. 핵 문제를 뒷전에 제쳐둔 버락 오바마 미국 정부만큼이나 우리 정부도 경직돼 있다. 지금으로선 6자회담 조기 재개로 이끌 동력이 나올 데가 없다. 남북 관계에서도 대결 기조가 강하다.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는 없고 ‘북한은 없어져야 할 나라’라는 막말이 앞선다. 통일대박론은 모든 책임을 북한에 떠넘기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작동한다.
지난 몇 달 동안 한반도·동아시아 정세에는 눈여겨봐야 할 변화가 있었다. 우선 미-중 대결 구도가 구체화하고 있다. 대중국 봉쇄 뜻을 분명히 한 오바마 대통령의 4월 하순 아시아 순방, 뒤이은 중국의 남중국해 진출 강화 등은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집요한 시도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강화 움직임 등은 미-중 대결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한반도 문제는 이런 구도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
북-일 협상의 시작은 이 구도 속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한 것이다. 5월 하순 일본인 납치 문제 재조사와 대북 제재 일부 해제 등에 전격적으로 합의한 두 나라는 1일 후속 회동을 한다. 우리 정부는 먼산바라기를 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일 처음으로 서울에 온다. 북한보다 우리나라를 먼저 찾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지만, 중국은 미국·일본에 맞서 우리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가장 큰 의미를 둘 것이다. 우리로서는 한반도·동북아 현안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중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첫째, 6자회담을 조기에 재개해야 한다. 우리나라와 중국이 적극 움직인다면 재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북한이 일정한 태도 변화를 보이는 건 필수지만 이는 그냥 기다린다고 이뤄질 일이 아니다. 북한이 태도를 바꾸도록 접촉을 하는 것 자체가 진전이다. 당연히 미국이 나서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우리가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둘째, 남북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출발은 5·24 조치 완화·해제다. 최근 정부는 낮은 수준의 남북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서로 마음을 크게 열 수 있는 시도가 필요하다. 북한 국방위원회의 30일 ‘특별제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남북·미·중 4자 회동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핵 문제 해결을 뒷받침하면서 미-중 대결 흐름을 동북아의 다자간 협력 구도 속으로 흡수할 수 있는 좋은 틀이다. 이를 위한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이런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통일대박론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활력과 의미를 갖게 된다. 반대로 지금처럼 무전략·무정책이 계속된다면 통일대박론은 남은 임기 내내 박근혜 정부를 옭아매는 덫이 될 것이다.
김지석 논설위원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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