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철학사에서는 흔히 인식론을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이라는 두 갈래로 구분한다. 그 구분의 근본적인 근거는 인간이 태어날 때 자신의 정신 내부에 직관이나 추리의 능력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있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은 그 본유관념을 갖고 태어난다고 보는 반면, 경험론자들은 인간 정신이 완전한 백지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존 로크는 <인간 오성론>에서 경험론을 체계적으로 확립시켰다. 그런데 백지상태의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용어로 ‘타불라 라사’라는 말이 흔히 사용된다. ‘빈 서판’이라는 뜻이니 인간이 자라나면서 겪는 경험들이 그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경험론의 인식 과정을 적확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로크가 <인간 오성론>에서 그 말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책에는 그 문구가 없다. 대륙의 합리론자였던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저서에서 로크를 공박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경험론의 이해를 돕는 어휘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그 저서의 출판을 포기했기에 그런 오해가 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험이 인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 경험들을 구성할 능력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그 수많은 경험들은 파편적인 잡동사니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타불라 라사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견해를 수정시켜야 할 만큼 명확한 사례를 본 것 같다.
국무총리를 비롯해 결격사유가 한없이 많은 고위 공무원들을 발굴하는 임명권자를 보면서 생긴 인식의 전환이다. 이해 능력은 물론 타인들과의 공감이나 소통의 능력이 전무함을 보면서 “이건 타불라 라사”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상태를 이순이 넘어서까지 유지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철학사는 한국적 관점에서 다시 쓰여야 할 것 같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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