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토머스 홉스는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절대왕정을 옹호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본성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려 하기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이어지고, 그 결과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억압한다. 이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외롭고 곤궁하고 야비하고 야만적이고 단명하다. 그 비참한 전쟁 상태를 피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강자에게 양도하는 대신 보호를 받는다. 그 최초의 사회계약의 결과로 군주제 국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펼친 책 제목인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다의 괴물을 가리킨다.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홉스는 판화가 아브라함 보스와 상세한 논의를 거친 끝에 표지의 삽화를 만들었다. 칼과 지팡이를 든 거대한 인간이 왕관을 쓰고 있다. 그 상단에는 “그에 비견될 큰 힘을 가진 자는 없다”는 욥기의 문구를 명기함으로써 이 형상을 바다의 괴물과 연결시킨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몸통과 팔은 수백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모두 등을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왕이 우두머리이고 이름 없는 백성들이 수족 노릇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17세기 영국에서 절대왕정을 옹호했던 책의 표지 그림이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를 투영하는 것 같아 참담하기 그지없다. 투표로 행정권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세습 군주처럼 행동한다. 보좌하는 주변의 인물들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못하며, 모두가 이름 없는 수족이 되어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한 치의 행동도 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홉스가 옹호한 절대왕정만도 못한 나라에 살고 있다. 최소한 그에게 국가라는 괴물의 본질적인 존립 이유는 무정부 상태의 차단과 약자의 보호였다. 강자를 보호하고 약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정책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는 아직도 야만적 자연 상태에 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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