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자
친구의 어머니는 선거날이면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치장을 한 후에, 누구보다 일찍 투표장으로 향하셨다고 한다. 올해 여든이 되신 그분은 앞으로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최근의 여러가지 사건들, 특히 4·16 세월호 사태를 지켜보면서 위정자들에 대한 실망이 컸고 자신이 그런 지도자를 뽑은 것에 대한 자책 때문에 투표장 발걸음을 끊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이분 세대에게 투표의 의미는 남다르다. 나라 잃은 설움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의 성원이 된 감동, 나라를 살필 지도자를 직접 자기 손으로 뽑게 된 감격의 순간을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이분에게 투표는 가족을 포함한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의 명철한 판단을 통해 자신과 가족, 이웃과 나라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비밀스럽고 엄숙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오늘 이분처럼, 이분을 대신해, 이분을 위해 목욕재계하고 투표장으로 향한다. 자신의 판단력을 더 이상은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신 이 지혜로운 할머니의 편안한 노후를 위해 이제 그 자녀와 손주세대가 현명한 판단을 할 때이다.
해방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 투표권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었고 요즘 선거는 눈살 찌푸릴 일만 많다. 표심을 사는 회식 자리며, 하루에도 몇번씩 걸려오는 특정 후보 지원 전화나 지지도 조사 전화도 이런 성가심 중 하나다. 이번에 서울에서는 시장과 교육감 후보 2세들의 발언으로 한바탕 술렁이기도 했다. 자고로 추장이나 부족장을 뽑는 대결의 장은 공동체적 삶의 핵심을 한눈에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장이지만, 현대판 선거판은 찌질하다 못해 비열하고 사악한 무대가 되어버렸다. 국정원 선거 개입설에서부터 댓글 알바꾼, 지킬 수도 없는 정책 남발에 네거티브 막장 공세, 스스로 ‘킹메이커’라 부르는 홍보 전략가들, 여기에 선거철이 대목인 여론조사업체가 가세해 각종 통계와 선정적 카피, 세련된 홍보물로 국민들을 헷갈리게 해왔다. 선거판이 승리를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며 팬덤의 산물이라는 것은 지난 대선에서 자명해졌다. 팬덤이라 함은, 강력한 권력자에 대한 선망과 동일시, 존경이 아닌 숭배 등으로 사적 욕망을 대중문화적 투시의 장을 통해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 누가 돈이 많고 권모술수에 능하며, 무시와 모욕의 언어에 능통한지를 겨루는 싸움판으로 전락한 선거판을 보며 국민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다행히 그 대한민국은 이제 바닥을 친 듯하다. 작년 말, 국민들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술렁이기 시작했고 이번 4·16 사태를 기점으로 ‘국가 낯설게 보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으로의 전환을 해냈어야 했다. 근대체제의 붕괴가 역력한 ‘위험사회’와 ‘재난사회’에서 안전에 대비한 체질 개선을 했어야 하는데 무지하고 미력한 정부는 ‘747’, ‘474’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대를 역주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들 하지만 지금은 아랫물을 맑게 할 때다. 적대적 국민을 양산하는 ‘불량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 환대의 국민/시민/주민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후보를 가려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부산 지역은 고리 원전 1호기를 중심으로 지자체장 선거가 치러져야 하고, 거대도시 서울은 삶의 회복력과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새판을 짤 수 있어야 한다. 산적한 글로벌, 국가적, 지역적 차원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협동과 연대의 감각을 지닌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은 목욕재계하고 막장 선거판에서도 품위를 유지한 이들에게 귀중한 한 표를 드리자. 저녁에는 삼삼오오 모여 신뢰를 쌓는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지역의 살림을 맡을 인물도 두루 물색할 겸 자주 회동하면 좋겠다. 새로운 정치는 실핏줄이 제대로 돌기 시작할 때 가능해지며, 이는 시민과 주민들이 일상적 삶의 위험과 가능성을 세심하게 파악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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