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위험작업중지권에 주목하자

등록 2014-05-20 18:29수정 2014-05-29 11:39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던 날, 불과 두 시간 전에 그곳에서 나왔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오후 3시쯤 5층 식당가에 올라갔는데 상가 한쪽 절반가량의 가게들은 조명이 꺼져 있었고 입구에 띠를 두른 채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반대편 상가들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내가 가려고 했던 콩나물국밥집은 조명을 끈 채 영업을 하지 않고 있어 지하 분식점에 내려가 새우볶음밥을 먹고 나왔다.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다.

두 시간쯤 지난 오후 5시55분, 삼풍백화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5층에 있던 직원들이 긴급히 “대피하라”고 외치며 뛰어내려오기 시작했지만 건물 안에 있던 1500여명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불과 20여초 만에 5층에서부터 지하 4층까지 매몰됐다. 길 건너편 사무실에 있던 내 귀에도 건물이 무너지는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그 사고로 502명이 사망했다. 특이한 동작으로 국물 간을 보던 분식점 주인이나 1층 보석특별전 행사장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보석 구매를 권유했던 점원도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식당가의 절반쯤에만 조명이 꺼져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건물이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 벽과 천장과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한 쪽은 장사를 하지 않고, 나머지 절반 쪽에서는 여전히 영업을 하게 했던 것이다. 5층 바닥의 갈라진 틈 사이로 1층이 훤히 보였을 정도였다는데도 영업을 계속하도록 지시했던 백화점의 주요 임원들 상당수는 대책회의 도중 피신하라는 연락을 받고 빠져나갔다. 어찌 세월호 사건과 이렇게 같을 수 있는가?

그날 만일 상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백화점 밖으로 모두 나가도록 대피시킨 직원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백화점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고 보수 공사를 한 뒤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해당 직원은 징계를 받아 해고됐을 것이고, 회사는 매출 손실과 이미지 손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수백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을 것이다. ‘위험작업중지권’이 노동자에게 실효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선원들에게 위험한 운항을 중지할 권리가 명실상부하게 보장돼 있었다면 참사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88년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가 15살 나이에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군 사건 등 노동재해 문제가 집중적으로 발생하자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노동과 건강 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안전을 실효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자는 운동이 폭넓게 진행됐고, 실제로 1990년에 산업안전보건법이 대폭 개정됐다. 쟁점이 된 조항 중 하나가 위험작업중지권이었다. 조선소 등에서는 족장(비계)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아 노동자가 추락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위험해서 못 올라가겠다”고 작업을 거부하는 노동자에게 관리자가 “그럼 그런 회사에 가서 일하라”고 윽박지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올라갔다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산업안전보건법 제26조에 작업중지권이 규정되기는 했다. 사업주는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노동자를 대피시키는 등의 조치를 해야 하고, 노동자는 급박한 위험으로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하였을 때에는 지체 없이 그 사실을 보고해야 하고,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노동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의 거듭된 요구에도 “위험한 작업을 중지할 권리가 있다”고 분명히 명시하지 않은 채 ‘급박한 위험’에만 한정하고 있어 해석에 많은 논란이 있다. 노동조합이 힘을 갖고 있지 못한 사업장에서는 유명무실한 권리에 불과하고 노동자들도 그러한 권리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1994년 에스토니아호가 침몰해 852명이 희생되는 참사를 겪은 뒤, 스웨덴은 매뉴얼보다 안전교육을 강화하는 해법을 선택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위험작업중지권이 분명하게 명시되고 각급 학교와 기관 등에서 위험작업중지권에 대한 교육이 광범위하게 시행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대통령이 흘린 눈물의 진정성을 믿겠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마지막 명령 1.

마지막 명령

국힘 ‘2~3월 퇴진론’…기다렸다간 구속된 대통령 볼 수도 2.

국힘 ‘2~3월 퇴진론’…기다렸다간 구속된 대통령 볼 수도

국힘 ‘2~3월 하야’, 그때까지 ‘대통령 윤석열’ 하란 말인가 3.

국힘 ‘2~3월 하야’, 그때까지 ‘대통령 윤석열’ 하란 말인가

[아침 햇발] 윤상현의 공과 사 / 김이택 4.

[아침 햇발] 윤상현의 공과 사 / 김이택

[사설] ‘국지전’ 유발 의혹 윤석열, 군 통수권 서둘러 빼앗아야 5.

[사설] ‘국지전’ 유발 의혹 윤석열, 군 통수권 서둘러 빼앗아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