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전쟁은 끝났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종 대학살이 감행된 2차대전이었기에 전쟁 범죄자들의 죄과를 따지는 일은 국제적으로 초미의 관심사였다. 나치 친위대로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 1961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시사 잡지 <뉴요커>가 한나 아렌트에게 참관기를 의뢰했다.
아렌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출신 유대인이었다. 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극좌와 극우는 테러에 의존하는 전체주의적 지배 형태라는 점에서 같다는 주장을 펼쳐 학문적 논란의 중심에 서며 이름을 알린 정치철학자였다. 그의 참관기는 재판의 전체적 모습, 특히 피고의 논리에 대한 인상적인 해석을 담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부제의 문구 “악의 평범성”이란 평범한 관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근면하게 직무를 수행하며 악마저 성실히 반복해 무뎌진 윤리관으로 악행을 저지른다는 뜻이다.
재판 과정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논리로 칸트의 ‘정언명령’을 내세웠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명령에 복종한 것이기에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항변이었다. 그 명령권자가 히틀러였을 뿐이라는 주장은 칸트가 들었으면 통곡할 오독이었다. 칸트가 말한바 그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자는 인간 개개인의 내부에 있는 도덕적 자아이다. 바꿔 말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월호 참사 처리 과정에서 보인 이곳 관료들의 행태는 ‘악의 평범성’에 정확히 부합한다. 아이히만처럼 그들은 어떤 생각도 양심도 없이 대통령의 명령만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 결과로 우리는 수백명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기막힌 현실을 목도했다. 그 희생이 증언해 보인 이 땅의 무수한 ‘평범한 악’들의 죄상을 끝까지 묻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 미래는 없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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