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급격한 산업화로 경제가 팽창했다. 노동자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성장이었다. 산업 거점의 하나였던 시카고에서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리며 일주 6일을 하루에 10여시간씩 일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그 상황을 개선시키려 했고, 최근에 이민 온 독일계 노동자들이 큰 힘을 보탰다.
1886년 5월1일이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한 총궐기의 날로 잡혔다. 미국 전역에서 파업이 있었다. 이 운동의 진앙, 시카고에서도 파업과 시위와 행진이 며칠째 이어졌다. 경찰은 물론 사설 경호 회사인 핑커튼 대원들까지 파업을 저지하려 했다. 대체로 큰 사고가 없이 진행되었지만 5월3일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경찰의 총격에 노동자 두명이 사망했다.
5월4일 헤이마켓 광장에 노동자들과 그들만큼의 경찰이 운집했다. 그러나 시위는 평화로웠다. 독일어판 <노동자 신문>의 편집자 오거스트 스피스가 연단에 섰다.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가 이곳에 모였다고 보는 듯합니다. 그래서 ‘법과 질서’를 지킨다는 사람인 경찰이 전쟁을 하듯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여덟시간 노동의 취지를 설명하려는 것뿐입니다.”
군중이 너무도 조용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던 시장조차 일찍 귀가했다. 그러나 경찰 병력이 연단으로 진군했다. 누군가가 사제 폭탄을 던졌고, 이어진 총격으로 십여명이 사망했다. 언론은 노동운동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고, 그런 분위기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밝혀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재판관은 일곱명의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배심원단 대다수가 피고들에 대한 편견을 인정했음에도 그대로 진행된 재판이었다.
“우리들을 처형해서 노동운동을 잠재울 수 있다면 우리들을 처형하라. 우리의 침묵이 우리를 교살하는 당신들의 목소리보다 강력해질 때가 올 것이다.” 스피스가 교수형 직전에 한 말이다. 메이데이가 슬픈 연유이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