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자
2004년 칸 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주목을 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도시에 버려진 아이들을 슬픈 동화처럼 그려낸다. 도쿄 한 작은 아파트에 네 남매와 엄마가 이사를 온다. 아이 넷이 달린 싱글맘이면 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집주인에게 12살 장남 아키라만 소개하고, 나머지 아이들을 짐 속에 숨겨 들여간다. 아키라만 학교를 가고 다른 아이들은 학교도 가지 않는다. 잠입 성공을 자축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이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고 밖에 나가지 않는 등 ‘철없는’ 엄마가 제시하는 금지 규칙들을 즐거운 게임 규칙으로 받아들인다. 어느 날 엄마는 아키라에게 동생들을 부탁한다는 쪽지와 돈을 남기고 사라진다. 아이들은 그 빈자리를 스스로 메우며 6개월이라는 나날을 보낸다. 감독은 ‘사회’가 모르는 시공간에서 서로를 돌보며 성장해가는 네 아이들을 통해 돌봄과 책임, 그리고 성장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1988년 일본에서 일어난 “니시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다룬 것인데, 이런 유기되거나 방치된 아동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지난 4월11일 “7년간 청소 안한 ‘쓰레기 방’에 방치된 4남매”라는 제목 아래 인천의 한 오물더미 집에서 7년 동안 지낸 4남매가 “경찰에 의해 구조”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뉴스에서는 이를 ‘아동 방치와 학대’ 사례로 보며 부모의 입건 여부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22살부터 서너살 터울로 계속 아이를 낳았던 39살 어머니는 저녁 8시에 출근해 밤새 일하고 아침 8시에 귀가하는 요양병원 간호조무사이고, 아버지는 지방에서 한달에 한번쯤 집에 왔다고 한다.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는 제대로 집안 청소나 설거지를 안/못했고 아이들은 쓰레기 더미 안에서 텔레비전 만화영화를 보며 놀았다. 17살인 장남은 부모의 방치 이유에 대해 “엄마가 잘 치우는 성격이 아니다. 그동안 익숙해져서 치우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얼마 전 다른 학부모들이 아이의 학용품을 챙겨주려 했을 때 무척 화를 냈다고 한다.
이 아이들은 청소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청소를 하며 살았고 청소를 못 하면 할머니와 이웃으로부터 잔소리를 들었으며 청소를 잘하는 이들이 많아 그런대로 양호한 청결 상태를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가 핵가족화되며 조부모와 이웃들이 아이들 삶에 관여할 여지가 줄어들었고 (한)부모가 부재한 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사회’는 없고 고립된 가정만 남았으며 아동 학대의 수준과 종류도 다양해졌다. 아이들이 삶의 기본을 익힐 환경은 급격히 사라지고 있지만 학교에서도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7년을 지냈다는 네 아이들이 거쳤을 담임교사 수를 세어보면 17명 정도가 된다. 17명의 담임은 아이들이 씻지 않아 냄새가 나고 철 지난 옷을 입고 다녀도 그냥 둔 걸까? 신발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청소를 깨끗이 하는 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기본 교육이 아닌가?
이런 말을 하며 내심 조금 두렵기도 하다. 정부에서 당장 청소 훈련을 철저히 하라는 지령을 내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린이집부터 학교까지 일사불란하게 아이들에게 청소 훈련을 시키며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더해갈 것이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모든 이의 복지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국가의 무모한 장담은 위험하다. 쓰레기를 청소하는 아이는 만들어내겠지만 스스로를 돌보는 사회는 키워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접하며 내가 고레에다 감독을 떠올린 건 그가 <아무도 모른다> 이후에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의 작품으로 줄기차게 ‘성장’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아이만이 아니라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 ‘함께’ 성장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사적(핵가족) 공간과 공적(국가) 공간 사이 공공영역, 곧 ‘사회’를 회복하며 찾을 수 있는 어떤 활동일 것이다. 서로를 돌보는 사람들이 모여 하는 청소 명상이 바로 그 시작이 아닐까 싶다.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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