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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슬픈 마제파

등록 2014-04-02 19:18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한 사람의 삶이 한 국가의 운명을 반영하는 듯한 경우가 있을까? 코사크의 귀족 이반 마제파가 그런 삶을 살았다. 그뿐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일들까지도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폴란드와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받았고, 서유럽을 폭넓게 여행했던 마제파는 우크라이나에서 코사크 족의 지도자 위치에 오른 뒤 학문과 예술을 후원한 것으로 명성이 높다. 바로크 양식의 교회를 영토 곳곳에 건립했고,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교육 시설을 대폭 확충했으며, 출판 사업도 장려했다.

1654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차르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정체성을 보장받는 페레야슬라브 조약을 맺었다. 이를 충실히 계승한 마제파는 표트르 대제의 신임과 후원까지 얻었다고 확신했으나 대제의 생각은 달랐다. 스웨덴과 벌인 대북방전쟁 초기에 패배해 영토를 잃자 대제는 러시아의 군대를 개혁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계획을 펼쳤다. 이미 우크라이나는 관심권 밖이었던 것이다.

폴란드와 스웨덴의 연합군이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넘어 침입해왔다. 마제파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도왔듯 러시아가 돕기를 기대했으나, 러시아는 방관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러시아의 조약 위반이 명백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러시아 정교의 교회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조약 위반이라며 마제파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그 결과 그의 추종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이후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에서 러시아가 결정적 승리를 거뒀다. 러시아의 가장 잔인한 보복은 주적 스웨덴이 아닌 코사크 족을 향했다. 군인은 물론 평민까지 학살하고 그 시체를 십자가에 묶어 드네프르 강에 흘렸다. 여전히 마제파에 동조하는 세력을 위협하려는 의도였다. 마제파는 도주하는 도중에 사망했다.

마제파에 대한 파문은 아직도 해제되지 않았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우크라이나에서는 마제파를 복권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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