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독일 통일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통일 대박론에 덧씌우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남의 옷을 아무 데서나 걸치는 것 같아 성공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이 지난주 옛 동독 드레스덴에서 발표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은 그 모순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독일 통일을 주도한 것은 동독 주민들이다. 1989년 5월부터 서독으로 가려는 동독인이 헝가리·체코·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과 동베를린 상주대표부 등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후 동독에서 분출된 개혁 요구는 월요 시위라는 주기적 형태를 갖췄고 10월에는 수십만명이 참가하는 규모로 확대됐다. 당시 동독 주민들은 체제 개혁을 지향했다. 주된 구호도 ‘우리가 인민이다’였다. 하지만 동서독을 갈랐던 베를린 장벽이 11월9일 무너진 뒤에는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는 구호가 힘을 얻기 시작한다. 개혁 요구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통일에 대한 욕구가 급격하게 커진 것이다. 이후 진행된 동독의 첫 민주선거(90년 3월18일), 동서독 화폐 통합(7월1일), 동독의 서독 편입을 결정한 동독 의회 결의(8월23일), 통일 선포(10월3일) 등은 정치권이 동독 주민의 요구를 제도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산모·유아 지원, 북쪽에 복합농촌단지 조성, 나진·하산과 신의주 등에서 협력사업 추진,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 등을 내용으로 하는 드레스덴 구상은 큰 뼈대를 갖추지 못한 채 경제·사회 분야의 몇몇 사업을 나열하는 식이어서 통일방안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우선 지금 한반도 상황을 통일이 임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드레스덴 구상 발표 직전 ‘베를린 장벽처럼 우리 휴전선도 반드시 무너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독 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북한 주민들의 체제 개혁 요구가 조만간 거세게 분출해 휴전선이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의 구상에는 지금의 남북 관계를 어떻게 통일 지향의 관계로 바꿔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통일은 당연히 오는 것이고 북쪽 주민은 남쪽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제한다.
구상의 세부 내용도 공허하다. 제안 내용들은 지금 북한 주민이 요구하는 것도, 북한 정권이 바라는 것도 아니다. ‘모두 당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니 북쪽은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독일의 사례로 보면 통일 선언 이후 ‘통합’ 과정에서 해야 할 내용이다. 비료·식량 등 긴급한 대북 지원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어떻게 해서 이런 구상이 나왔을까. 우선 박 대통령이 지금 한반도 상황을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여권에서는 북쪽 주민의 민심이 이반되고 있으며 체제 붕괴가 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박 대통령은 적어도 남북 교류·협력 강화를 지지하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지만 기본적인 상황 판단은 공유하고 있을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략적인 이유로 통일 대박론을 활용하는 경우다. 통일 대박론에 대한 국민의 일정한 지지가 독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과 정부는 통일을 거론할 상황이 아님에도 ‘통일 드라이브’를 밀어붙인다. 이는 단순한 도박에 그치지 않고 남북 관계 전반을 왜곡한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미 군사훈련을 계기로 남북 사이 긴장이 높아지고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논의가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은 통일 대박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정부는 과거에 여러 차례 ‘실질적인 통일 준비’를 언급했다. 여러 노력이 이뤄졌고 그 일에 관여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부분 ‘통일 준비와 교류·협력 강화는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교류·협력을 착실하게 진전시키는 게 바로 통일 준비라는 뜻이다. 박 대통령이 통일을 말하려면 먼저 10·4 정상선언과 6·15 공동선언에 대한 존중심부터 보여야 한다. 10·4 정상선언은 드레스덴 구상보다 훨씬 틀이 잘 짜여 있고 내용이 풍부하다. 게다가 그것은 남북 정상이 합의한 것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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