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대기자
청운초등학교 아이들 바글대는 담장에 개나리 꽃망울 하나둘 터뜨리고, 꽃소식 물씬한 기적 소리에 몸 단 서울역 뒤편 고산자(김정호) 비석 옆 산수유가 눈부시다. 인왕·북악 산기슭 볕바른 곳엔 여지없이 생강나무 꽃향기 알싸하다.
그러나 꽃이 피었다고 어디 봄이겠는가. 여전한 꽃샘추위는 섣부른 꽃망울 대궁이째 얼려버린다. 시류 또한 꼭 그러하니 봄이 봄 같지 않다. 대통령선거 때 보수 여당의 복지와 경제민주화 공약에 봄날이 온 줄 알고 환호했다가 동태가 되어버린 노동자, 농민, 장애인, 도시빈민이 그렇다. 그때 약속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장하준 교수(영국 케임브리지대)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 수많은 빨간 펼침막(플래카드)은 복지국가의 봄을 알리는 꽃과도 같았다.
요즘 다시 그 빨간 펼침막이 내걸리고 있다. 번다한 길목 눈에 잘 띄는 곳에는 여지없다. 내용인즉 ‘여성, 장애인 공천 새누리당이 책임진다’ ‘불효막심 민주, 기초연금법 협조하라’ ‘어르신 연금 새누리당이 책임진다’ 따위다. 지방자치선거 무공천 공약을 파기하고는 핑계로 내건 게 여성, 장애인이고, 모든 어르신께 기초연금을 두 배씩 더 드리겠다고 했던 약속을 뒤집고 한다는 게 야당 핑계이니, 그 철면피가 경이롭다.
요즘 일본에선 총리 이하 과학자, 예술가들이 쏟아낸 거짓말에 양심적 지식인들의 속앓이가 적지 않다. 반듯한 태도, 깍듯한 예절… 좀체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 덕분에 일본은 한때 최고의 신용을 자랑했으니, 세계인의 눈총도 크다. 직접 계기는 30대 여성 연구원이 발견했다는 만능세포가 가짜로 들통난 사건이지만, 실은 유명인들의 누적된 거짓말들이 문제였다. 앞서 모리구치 히사시가 2012년 미국에서 유도만능줄기세포를 이용해 중증 심부전 환자의 이식 수술에 성공했다는 거짓말이 있었다. 일본인의 긍지였던 청각장애 작곡가 사무라고치 마모루는 멀쩡한 청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십수년 동안 일본인들을 속이며 다른 이의 곡까지 제 곡으로 속여 발표했다.
이런 거짓말 때문에 새삼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우파 정치인들이 눈만 뜨면 늘어놓는 거짓말이었다. 대표적인 게 아베 신조 총리.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통제되고 있다느니,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협상에 불참하겠다느니, 장기적으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겠다느니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고노 담화를 놓고도 폐기와 유지 사이에서 야바위꾼 짓을 하고 있다. ‘혼네(진심)는 어느 쪽일까, 맞혀 보시라.’
양심적인 이들의 걱정은 연구자에게까지 번지는 거짓말 확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게 어때서?”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국민의 태도가 더 큰 걱정이다. 장기 불황에 자연재해, 국제적 따돌림이 겹쳐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겠지만, 그로 말미암은 불신, 분노, 절망, 자포자기 사회가 더 걱정스럽다.
하지만 일본을 걱정하는 건 사치다. 일본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게 우리 대통령이고 우리 정치인이다. 게다가 이에 대한 유권자들의 무관심과 외면 또한 일본 못지않다. 벌써부터 거리 곳곳에 내걸리는 후안무치의 빨간 펼침막은 그 상징이다. 그들에게 유권자는 조삼모사 고사 속 원숭이쯤으로만 보인다. 이른바 ‘여왕의 남자’들의 거짓말은 한 수 위다. 김황식 전 총리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거짓말부터 배웠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과 만나 여러 가지 상의를 했지만 출마 이야기는 없었다?’ 간첩 증거 조작 사건을 놓고 떠벌린 윤상현, 김진태 의원의 기이한 말들은 하도 뒤집고 빨아 누더기 걸레가 되었다.
매화 벚꽃 살구 앵두 등 봄꽃이야 대충 희겠거니 했는데, 돌아보니 이른 꽃들은 오히려 노랗다. 생강나무, 산수유, 개나리…. 5행에서 노랑은 중앙과 대지를 나타내고, 땅의 샘이란 뜻도 갖는다. 샘은 생명의 원천. 잔잔한 감동을 주는 ‘노란봉투’의 노랑도 우연 같지 않다. 진실, 사랑, 존엄, 배려, 관심 등의 꽃잎을 단 노란봉투는 꽃보다 더 깊이 마음속 봄을 일깨운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하다. 그 작고 여린 꽃들이 저 거짓의 철옹성에 상처나 입지 않을는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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