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국가정보원 직원과 검사들이 간첩 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간첩 잡는다는 이들이 거꾸로 ‘간첩 잡는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지난주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탈북 화교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담당 검사와 국정원 직원을 검찰에 고발한 죄목은 국가보안법상 증거 날조·은닉죄다. 보안법 관련 조항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제12조(무고, 날조) ①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이 법의 죄에 대하여 무고 또는 위증을 하거나 증거를 날조·인멸·은닉한 자는 그 각 조에 정한 형에 처한다.
②범죄수사 또는 정보의 직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이나 이를 보조하는 자 또는 이를 지휘하는 자가 직권을 남용하여 제1항의 행위를 한 때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다만, 그 법정형의 최저가 2년 미만일 때에는 이를 2년으로 한다.”
아주 엄격하다. 보안법 위반 사건을 다루면서 증거를 날조하거나 은닉하면 사실상 간첩과 동등할 정도의 엄벌에 처할 것처럼 추상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조항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정보기관 수사관이나 검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처벌은커녕 이런 혐의로 고발당한 경우도 없었다. 지난주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탈북 화교 간첩사건’ 수사 검사들과 국정원 직원을 증거 날조·은닉 혐의로 고발한 게 처음이다.
그럼 그동안 수많은 간첩 사건들은 완벽한 증거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수사가 이뤄졌을까. 아니다. 최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간첩 사건들을 보면 증거를 조작하고 날조해 ‘간첩을 만들어낸’ 사례가 부지기수다.
10년 이상 진상이 감춰졌던 ‘수지 김 간첩사건’은 국가기관이 어떻게 간첩을 만드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7년 1월 홍콩에서 수지 김씨가 남편인 윤태식씨에 의해 피살됐다. 그러나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는 살해된 김씨가 윤씨와 위장결혼하여 남편을 북한으로 납치하려다 피살된 간첩으로 만들었다. 당시 안기부는 윤씨가 김씨를 살해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씨를 간첩으로 만들었고, 외무부도 안기부의 요청에 따라 진실을 외면했다. 국가기관이 공모해 남편한테 억울한 죽임을 당한 김씨를 간첩으로 조작한 것이다. 간첩으로 몰린 김씨의 가족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재일동포로 1980년대 초 연세대 대학원생이었던 김병진씨가 당한 경우는 훨씬 더 악랄하고 지능적이다. 김씨는 1983년 7월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전신) 서빙고분실에 간첩 혐의로 연행돼 온갖 고문을 당했지만 혐의가 드러나지 않자 공소보류 처분을 받은 뒤 보안사 직원으로 특채됐다. 그 뒤 2년 동안 보안사가 간첩을 어떻게 조작해 내는지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다. 김씨는 보안사 요원들이 “우리가 간첩이라고 말하면 간첩”이라며 “피의자를 법정에 보낼 때는 여기서 북의 혁명사상을 교육시켜 보낸다”는 말까지 자랑스럽게 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보안사>(소나무, 1988년)란 책으로 묶어 출판했다. 간첩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이제는 증거를 날조해 무시무시한 간첩을 만들어내는 일은 없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탈북 화교 간첩사건’에서 보듯, 국정원과 검찰이 ‘위조한 문건’(중국 정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을 간첩 유죄 증거로 법정에 제출해 논란이 되고 있다. 거꾸로 무죄 증거가 되는 사진과 통화 기록 등은 은닉하고 제출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은 박근혜 정부 들어 옛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음습한 악습이 국정원에 의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갖게 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장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국가기관이 거꾸로 증거를 날조해 간첩을 만들어낸다면 그런 국가기관은 존재 의미가 없다. 검찰이 이번에 고발된 국정원 직원과 검사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그래서 중요하다. ‘간첩 조작’이란 말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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