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대기자
세상에 못난 자식으로 치자면, 첫째가 부모 유산이나 파먹는 자요, 둘째는 쥐꼬리만한 유산을 놓고 싸움박질하는 자들이다. 요즘 막장드라마에선 출생의 비밀을 앞세워 유산을 노리는 자도 나온다. 서두부터 비유가 고약하다. 그러나 엊그제 안철수 의원이 신당의 내용을 대충 드러냈으니, 이들이 호남을 놓고 벌이는 유산 다툼에 대해 따져보지 않을 수 없겠다.
신당의 지향은 ‘민주적 시장경제’ ‘일자리·교육·복지의 삼각축이 버팀목과 사다리가 되어주는 따뜻한 공동체’, ‘민족의 평화공존과 통일’, ‘정의롭고 공정하며 기득권과 특권이 용납되지 않는 활기찬 사회’였다. 하지만 안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그건 김대중 총재 시절부터 민주당이 내걸었던 기치였다. 비록 지금의 김한길 대표 체제가 우편향 수정을 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민주당 강령의 뼈대는 그와 같다.
그 점에서 안 의원의 멘토 한상진 교수의 지적은 솔직했다. 내용은 좋은데 감동을 줄 만한 화두가 없다며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처럼 “많은 상상력과 영감 그리고 희망을 주는 화두”를 요구했다. 그는 김대중과 함께 박정희도 끌고 와 ‘안철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지만, 방점이 찍힌 곳은 분명했다. 박정희 유산은 박근혜 대통령의 몫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야당 시절 김 전 대통령에게 ‘그 뜻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했다. 입발림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그런 ‘박근혜의 길’을 뒤늦게 따르는 것이 무슨 득이 되고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걸 모를 리 없는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오늘날 민주당이 김대중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도 지하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적통의 문제다.
적통과 유산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안 의원은 5일 전북에서, “전북부터 묻지마 투표를 종식해 달라”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전북의 희망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몹시 거북한 발언이었다. 그동안 전북은 민주당이 공천하면 부지깽이에라도 투표했다는 말인가? 지난해 11월 말 안 의원의 또 다른 원조 멘토는 광주에서 열린 윤장현씨와의 토크콘서트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라도는 민주당을, 경상도는 새누리당을 무조건 찍어주는 왜곡된 투표행위는 투표권을 없애는 것과 같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주의가 국민의 표와 의사를 왜곡하는 것을 개선해야 한다.” 윤씨는 지금 안 의원의 새정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이며, 안철수 신당의 후보로 광주시장 출마를 꿈꾸고 있다.
호남은 알다시피 ‘김대중 대통령’도 만들었지만, 부산 출신의 ‘노무현 대통령’도 만들었다. 진보정당의 또 다른 교두보가 되었고, 시민사회 후보의 보금자리였다. 호남이 그러했던 것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1990년 3당 합당과 함께 등장한 수구 냉전 지역 권력복합체를 깨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그 결과였다. 이순신 장군의 말(‘생각하노니 호남은 국가의 울타리라. 竊想湖南 國家之保障’)마따나, 호남은 민주주의의 울타리였던 셈이다.
그런 곳에서 고작 한다는 게 급조한 호적으로 유산 분할을 주장하면서, 묻지마 투표를 나무랐으니 제정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대의 유산을 탕진하면서, 그 유지와 유업은 방기하다시피 하고 이젠 정체성마저 의심받는 민주당 탓도 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제대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싶었다면, 앞선 호남의 선택들을 공부했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호남에 추파를 던지지도, 인연을 지어내지도, 밀려난 정치꾼들로 패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저 비호남 권력복합체를 깨기 위해 바보처럼 영남의 철옹성에 몸을 던지고 또 던졌을 뿐이다.
호남이란 유산은 민주주의를 위한 밑천이지 정치판의 판돈이 아니다. 민주당도 신당도 함부로 넘봐선 안 된다. 적통 평가를 받으려면 다른 지역에서 민주주의 지형을 확충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전투구 끝에 동반 몰락이 걱정된다면, 다를 것도 없는 이들끼리 합쳐서 자산을 늘리면 된다. 그 뒤 평가를 받아도 된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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