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2008년 미국 대선이 끝난 직후인 11월6일, 대통령 당선자인 버락 오바마는 선거 때 그를 도왔던 10여명을 모아놓고 앞으로 미국이 해결해야 할 경제적 난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전 미국 연준 의장인 폴 볼커는 “그동안 미국인들이 소득에 비해 너무 많이 소비한 것이 근본 문제”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이었던 로라 타이슨은 볼커의 의견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소득이 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로버트 라이시는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2011년)에서 당시 상황을 전하며 폴의 말은 틀렸고, 로라의 말이 맞다고 평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라이시는 당시 오바마 앞에 놓인 시급하고 근본적인 과제는 미국 중산층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폭넓게 공유할 수 있도록 경제 체제를 개편하는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런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회의의 초점은 막대한 모기지 부채로 옮겨갔고, 금융시스템 구제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결국 미국은 2008년 말부터 금융위기 해결을 위해 1조7000억원이 투입된 1차 양적완화에 이어 매달 850억달러의 자산을 사들이는 3.5차 양적완화 조처(2012년 12월13일)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돈 풀기에 나섰다. 정책금리도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그래서 미국 경제가 살아났을까.
대규모 양적완화 조처가 금융 시스템 붕괴로 인한 경제공황을 막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경제 위기의 근본 문제까지 해결했다고 보긴 어렵다. 양적완화 정책을 주도했던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퇴임하기 전 두 차례에 걸쳐 자산 매입 규모를 200억달러 축소함으로써 그의 양적완화 정책이 성공했음을, 즉 미국 경제가 살아나고 있음을 과시하려 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신흥국 금융시장 불안은 예상된 것이었지만 미국 금융시장도 크게 출렁임으로써 미국 경제가 아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라이시는 통화량 증대와 경기부양책의 효과가 사라진 뒤의 후유증을 이미 예고했다. 돈 풀기 효과가 사라지면 장기간 고실업 상태가 이어지고, 중위권 임금은 변동이 없거나 오히려 내려갈 것이며, 소득 불균형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단순히 돈 풀기로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위기의 가장 근본 원인인 불균형 심화 문제를 해결하는 게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소득 불균형과 경제 번영의 상관관계에 대한 라이시의 분석은 음미해 볼 만하다. 미국 경기가 호황이던 1970년대, 총소득에서 상위 1%에 돌아간 몫은 8~9%에 불과했다. 하지만 70년대 말부터 이 몫이 계속 늘어나 2007년에는 무려 23%에 이르렀다. 대공황 직전인 1928년의 수치도 2007년과 같은 23%였다. 이는 소득이 극소수 부유층에 치중됨으로써 대다수 중산층의 소득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소득이 줄어든 중산층이 이전의 소비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빚을 내는 수밖에 없다. 빚을 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빚잔치가 끝나면 경제는 파국을 맞는다. 1928년 극에 달한 불균형은 대공황이란 비극으로 귀결됐다. 반면 2007년의 불균형 심화로 초래된 금융위기는 대규모 돈 풀기로 미봉됐다. 이제 돈 풀기를 줄이니 위기가 재연되고 있다.
대다수 중산층의 소득을 늘려 그들의 구매력을 확보해 주지 않고는 경제가 장기적으로 활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게 역사적인 교훈이다. 왜 이런 단순한 ‘진실’에 주목하지 않을까. 저임금의 비정규직 양산을 부추기고, 최저임금 올리는 데는 한사코 반대하며 부자 증세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재벌 몰아주기를 당연시하는 불균형 심화 정책을 지속하는 한 경제번영은 요원하다. 오히려 위기의 일상화가 고착될 뿐이다.
이제는 강력한 소득 재분배 정책을 통해 불균형을 완화하는 쪽으로 경제 체제를 뜯어고치는 등 큰 틀에서 경제를 재편해야 한다. 실체도 모호한 창조경제나 경제혁신을 들먹이고, 늘어나는 일자리 개수나 세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런다고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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