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대기자
염수정 대주교가 추기경에 지명된 날, 서울 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의 논평은 당황스러웠다. ‘우리나라 전체의 큰 축복!’ 그것이 왜 우리에게 축복일까.
종교나 신앙의 차이로 말미암은 비틀림이 아니다. 이웃의 작은 경사에도 함께 기뻐하고 축복하는 우리의 미풍과 이웃 종교의 축일이나 경사에 함께 기쁨을 나누는 종교계의 양속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종교인의 직위란 닭벼슬만도 못한 것. 종교인은 오로지 빛과 소금이 되는 행실로써 평가받고 존경받을 뿐이다. 직위 때문에 존경하는 건 또 다른 우상숭배요 물신주의다. 염 추기경이 ‘두렵고 떨린다’고 한 말에 오히려 위로받는 건 그런 까닭이다.
작고한 김수환 추기경은 아름다운 사표로 남아 있다. 그가 한국 가톨릭을 대표했던 건 시대의 축복이었다. 그가 추기경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억압받는 약자들에겐 형제가 되었고 억압하는 자들에겐 두려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청주 교구장 시절 정치적 사형수의 봉성체를 기피하고, 살기 위해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가 불에 탄 주검으로 돌아온 이들을 외면한 또 다른 추기경은 결코 시대의 축복일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엘살바도르의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를 떠올리며, 염 추기경이 그와 같은 길을 걷기를 기도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애초 로메로 주교는 해방신학을 ‘증오에 찬 그리스도론’으로 비난했고, 약자들 편에 선 신부들을 과격분자 혹은 파괴주의자로 의심했다. 그러나 벗 그란데 신부가 극우 민병대에 암살당하자, 그란데가 사랑했던 가난한 이들 곁으로 다가갔다. 거기서 전체 인구의 90%에 이르는 약자들의 고통과 신음을 들었고,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탐욕과 폭력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아름답고도 어려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폭력의 근원은 극심한 빈부 격차입니다.” “교회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안에서 실현됩니다.”
동료 사제들까지 잇따라 살해당하자, 일부 사제들은 총을 든다. 그리고 ‘이 길밖에 달리 선택할 게 무엇입니까’라고 호소한다. 그러자 로메로는 단호하게 반문한다. “신부님은 사랑의 힘을 믿지 못하시는가요.” 그가 단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순교를 예감했고, 각오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를 죽일 때 나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흘린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이 곧 실현되리라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사제는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인 민중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염 추기경은 임명축하식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미 권고문 ‘복음의 기쁨’, 세계평화의 날 메시지 등에서 그 징표를 분명히 했다. “극소수 가진 자와 절대다수 사람들의 격차가 날로 커지고 있다. … 시장만능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관철된 결과이며, 그로 말미암아 무자비한 새로운 독재체제가 만들어졌다.” “이웃에 대한 우애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 불의의 뿌리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권고했다.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
염 추기경 말대로 화해와 공존, 분열과 갈등의 치유는 중요하다. 지학순 주교는 이런 내용의 옥중 편지를 남겼다. “화해는 공동선과의 화해이어야 하며, 독선에 반대하고 관용을 베푸는 아량이어야 하며, 전횡을 일삼아온 강자가 억압에 찌든 약자에게 청해야 하는 것이다.” 억압하고 군림하는 자들의 참회가 선행돼야 한다.
로메로의 신앙과 고백은 이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구현되고 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로이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위엄을 지니고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의를 위해 싸울 힘을 주셨나이다.” 염 추기경은 순교자 집안이다. 선조는 이웃의 자유와 존엄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당했다. 그것이야말로 남은 이들에게 축복이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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