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 논설위원
20년 전쯤 보건복지부를 잠깐 출입한 적이 있다. 어느 국장 방에 인사차 들렀는데, 이분이 심심했던지 한참을 붙잡고는 의료보험(건강보험)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냥 흘려들었지만 그래도 귓전에 남는 대목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원래 의료보험 할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1972년 이후락이 평양에 다녀오더니 `각하 큰일 났습니다. 이북은 지금 다 사회주의 무상의료입니다. 남북이 교류하다 보면 이게 알려질 테고, 그러면 이북에 동조하는 세력이 급격히 늘 겁니다’라고 보고를 한 거야. 그래서 부랴부랴 만들게 된 거지.”
최근 의료민영화 논란이 이는 걸 보고, 옛날 생각이 나 자료를 찾아봤다. 이후락 얘기는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73년 북한이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하고 자기네 무상의료를 선전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자극을 받았다는 설명은 나온다. 또 중앙정보부가 봉천동, 상계동 판자 주민들에 대해 “일단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 되는 상황이어서 유사시엔 예측 불가”라며 의료보장 대책이 시급하다고 건의했다는 내용도 있다. 건강보험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통치자의 측은지심보다는, 남북의 체제경쟁에서 비롯된 셈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비스마르크가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을 도입한 것도 혁명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치란 의도가 어떻든 결과가 좋아야 하는 법이다.
보건복지부가 의료민영화 괴담을 잠재우려 대대적인 선전에 나서고 있다. “국가가 운영하고 책임지는 건강보험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라는 문구도 들어있다. `효녀’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아버지가 애써 만든 건강보험을 무너뜨린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윤을 쫓아 흘러가게 마련인 돈의 생리를 생각하면 건강보험이라고 꼭 안전하란 법은 없다. 영리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지금도 병원들은 돈 버는 데 기를 쓴다. 선택진료나 1~2인실을 강제로 떠맡긴다. 병원의 주차장이나 장례식장을 이용하다 보면 바가지 쓴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앞으로 병원들이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나서면 별일이 다 벌어질 것이다. <에스비에스>가 만든 다큐멘터리 `최후의 권력’을 보면, 미국 병원들이 쓰는 각종 기발한 방법들이 등장한다. 기침할 때 통증이 완화된다며 곰 인형을 안기고 7만~21만원을 받는다. 알약 먹는 전용 컵이라고 쓰게 하고는 530만원을 청구한 사례도 있다. 미국 의사들이라고 특별히 돈에 환장한 건 아닐 것이다. 제도가 달라지니 인술이 상술이 돼버린 것이다.
의료비가 오른다고 건강보험이 바로 붕괴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상분이 건강보험에서 빠져나가면 건강보험 재정이 부실해져 무너져내리게 된다. 그 돈이 환자 호주머니에서 직접 빠져나가도 마찬가지다. 의료비가 오르면 환자들은 민간보험을 찾을 수밖에 없고, 민간보험 의존도는 점차 높아진다. 건강보험은 별 소용도 없으면서 다달이 봉급에서 돈을 빼가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굳이 건강보험을 지켜야 할 필요가 약해지면, 보험회사들이 건강보험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될 것이고, 국회에서도 동조하는 의원이 늘 것이다. 게다가 문형표 복지부 장관은 민간 의료보험의 활성화가 오랜 소신이다. 고양이에게 어물전을 맡긴 꼴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마 순수하게 경제살리기 차원에서 의료정책에 접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운하 추진을 염두에 두고도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고 꼼수를 부린 이명박 대통령과는 다르다. 하지만 문제는 의도가 순수했는지 여부가 아니다. 병원에서 돈 버는 길을 터주는 순간, 환자들 등골 빼먹는 자본이 몰려들어 괴물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아버지는 건강보험을 만들었으나, 무너뜨린 건 그 딸이었다고 역사가 기록할지도 모른다.
김의겸 논설위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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