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새해 벽두부터 가슴 아픈 소식이다. 한 40대 남성이 ‘박근혜 사퇴’와 ‘특검 실시’를 외치며 몸을 불살랐다. 세상사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사람 목숨만큼 귀중한 건 없다.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남모를 고뇌가 있었겠지만 이런 극단적인 행동이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18대 대통령 선거 부정 논란은 지난 한 해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훼손하는 국기문란 사건이다.(<한겨레> 김도성 피디의 ‘독재 1.9’, www.youtube.com/watch?v=-hgAdqrs9BU) 여권은 해가 바뀌었는데 아직도 ‘대선불복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흐지부지될 일이 아니다.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은 선진국이라면 이미 재선거를 했을 심각한 불법행위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이 골방에 틀어박혀 특정 후보를 비방 또는 지지하는 댓글을 달고, 수사에 나선 연방수사국(FBI)이 이를 은폐·조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에 맡기자. 박 대통령은 지난 연말 ‘일류국가론’을 장황하게 펼쳤지만 이런 부끄러운 일이 묻혀 가는 대한민국이야말로 딱 ‘삼류 국가’다.
사실 이 문제는 오래 끌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안이었다. 처음 문제가 불거졌을 때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문책을 했다면 전 정권의 일로 마무리되고 떳떳하게 새출발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진상 규명은커녕 국정원 선거 개입 관련 수사를 지휘하던 검찰총장을 사실상 몰아내고, 국정원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는 등 ‘2차 범죄’를 저질렀다. 이제 이 사안은 전 정권의 일에서 박 정권의 일이 돼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 사퇴 요구가 계속되는 건 당연하다.
박 대통령이 부정선거 논란에서 벗어나려면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수사 대상에 포함하는 특검을 해 진상을 명백히 밝히는 일부터 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그 방법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박 대통령은 남은 임기 4년 내내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박 대통령 자신이나 국민 모두 불행이다.
철도노조 파업은 여러 측면에서 박근혜 정부의 속성과 앞날을 가늠해볼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정부는 철도파업 강경진압을 통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계를 확실하게 굴복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였다. 명분은 공공부문 개혁이었지만 사실은 노동계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다. 교원노조의 법외노조 통보와 공무원노조 불인정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철도파업 중단 이후의 정부 태도를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철도노조의 파업 철회 이후에도 정부와 코레일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징계를 강행하고, 검찰과 경찰은 파업 지도부 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 대통령까지 나서 철도파업을 둘러싼 유언비어를 단속하라는 엄명까지 내렸다.
정부는 철도파업에 대해 타협하지 않고 원칙대로 밀어붙여 노조를 굴복시켰다고 보는 모양인데 이는 착각이다.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국민적 지지가 여느 때보다 높았고, 파업도 최장 기간인 22일이나 지속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노조를 ‘대화 상대’가 아닌 ‘분쇄 대상’으로 삼는다면 노사관계 정상화는커녕 1년 내내 정부와 노동계의 끝없는 분쟁만 있게 될 뿐이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한 축인 노동계를 배척하고는 성공적인 국정운영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성과를 기대하긴 이르지만 희망도 보였다. 국회에 철도산업 발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를 잘 발전시키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제도적인 모델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하려면 각 경제·사회 세력들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사회적 논의기구가 필수적이다.
언제까지 ‘승자 독식’ 논리에 빠져 상대를 힘으로 억누르고 자신들만의 ‘법과 원칙’에 굴종하도록 강요할 것인가. 그래선 저항과 갈등만 증폭될 뿐이다. 새해에는 모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한 해가 되기를 빈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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