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새해의 희망에 부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달력의 빈칸을 채울 가슴 부풀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이 탓도 있을 테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3주 전 우리 사회에 큰 술렁임을 안겨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건을 두고 수업에서 한 학생이 한 말이 생각난다. “원래 안녕하지 않은 것이 정상이 아닌가요?” 컵에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아 있으니 더 이상 줄지 않도록 노력하면 되고, ‘멘붕’에 빠져 허우적대도 신체적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지 않기에 그는 ‘안녕’했다고 한다.
주현우씨의 대자보로 모처럼 ‘안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 술렁임이 무기력한 패배주의로 끝나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또한 ‘안녕’을 둘러싼 담론이 단단히 방어막을 쳐둔 자기 마음속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순수함 때문이라며, 그 움직임이 색깔론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랐다. 주현우씨가 노동당원이라는 언론플레이, 철도노조 시위에 참여했다는 보도 등으로 인해 “아, 내가 감동을 느꼈던 것이 저들의 놀음에 놀아난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까봐 두렵다는 것이다. 편향된 정보만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진보’와 ‘보수’는 사실상 같은 편이라면서 그는 완충지대의 중요성을 말했다. 사회 부동층은 가만히 열린 채로 좌우로 ‘진동’할 수 있을 때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진동은 무엇에 의해 일어나는 것일까? 그는 ‘팩트’가 중요하다고 한다. 제대로 정보가 있어야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정보사회에서 ‘팩트’의 조작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니 난감한 일 아닌가? “믿을 건 나밖에 없다”며 부지런히 정보를 찾고 ‘냉철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 그 행위는 불충분한 정보를 계속 사냥하는 행위로 이어질 뿐이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며 알아낸 ‘진실’을 올리는 사이트에 네티즌들이 몰리지만 그곳이 금방 배설의 공간이 되어버리는 이유도 외톨이들의 독백이 주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는 것에 익숙하고 아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또다른 학생의 표현에서처럼 ‘앎에 대한 의지’가 아닌 ‘무관심의 의지’가 커지는 탈계몽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동’이란 사회적 존재들이 만나서 일으키는 떨림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십여년 동안 우리 사회는 사실상 자신을 열어 누군가와 친밀하게 만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해왔다. 난감한 상황에 대해 의논하려는 행위는 그 자체로 경쟁에서 밀리는 짓이며 시간 낭비였다. 학교건 학원이건 회사건, 모든 것에 등수를 매기면서 가시적 성과만을 강조해온 조직은 ‘관계적/협동적 자아’의 영역을 제거하기 바빴다. 소비사회 또한 지불한 것 이상의 관심과 애정을 기대하는 것은 규칙 위반임을 가르쳐왔다. 그래서 어느샌가 누군가와 더불어 한다는 것은 마지못해 하는 일시적이며 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라는 자유로운 만남 속에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던 경험의 장은 사라지고 적대적 세상에 홀로 된 개인들만 남았다. 그렇게 고립된 사람은 무시와 모욕의 상황을 홀로 견디고 무기력을 학습하며 살아간다.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평론가 사사키 아타루가 이 시대를 두고 한 말이다. 아직도 겁없이 모든 비극에 뛰어드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이제는 어떤 비극에도 참여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다수다. 그래서 세상을 보는 태도를 바꾸면서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기보다 더불어 사는 시간 자체를 늘려갈 수 있으면 좋겠다. ‘팩트’ 운운하는 초합리적 바보들이 줄어들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들보다 ‘친밀한’ 인연을 이어가는 이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오래전 동료들을 찾아 나서거나 이웃과 함께 난감한 현실을 공유하며 느슨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를 맺다 보면 뜻하지 않은 선물이 우리 곁에 다가오지 않을까? ‘협동적 자아’를 만들어가는 일들로 살림/살이의 경제영역도 늘리고 우리 자신도 소생하는 새해이길 소망한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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